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문연 Mar 21. 2016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어려운 거다.

학교의 고백 '말해줘서 고마워'를 보고 -  2012년에 쓴 글


그 동안 쟁여두고 있던 글감들 대방출~!!  

학교의 고백이다. 이거 원래 10회짜린데 난 어쩌다 마지막 방송만 봤다. 음. 리뷰 시작한다. 


학교의 고백 참 재미있게 봤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생생한 그 시절의 아픔?은 아니고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그런지 제대로 감정이입했다. 제작진보고 자기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이런 얘기 한 적이 처음이라고 말하는 고등학생들을 보며 눈물이 났다.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계속해서 공부만 해야 하는 입시기계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 1등을 해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는 전교 1등의 말처럼 그들에게 제대로 된 삶의 가치관을 심어줘야 할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과연 무얼 하고 있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자식이 없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그냥 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나도 다 지나온 시절이지만 나 역시 공부 잘하고 예쁨 받는 학생 역할이 아닌, 문제학생까지는 아닌데 이상하게 개기는 타입으로 캐릭터를 구축했었다. 한 번이라도 누구를 가르쳐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한 번에 가르쳤을 때 단 번에 알아듣는 아이가 가르치기 편하다는 것을. 누구나 편한 것을 좋아한다. 어려운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학생들과 말도 지지리 안듣는 학생들을 싫어한다. 가르치기 어렵고, 다루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런 학생들을 보면서 '공부'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뿐, 분명히 다른 쪽으로 가면 이 아이는 훨씬 재능이 많을 거다라고 생각한다. 획일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런 생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단연 획일화다. 그런데 수능을 보려면 시험을 쳐야 하고, 시험을 잘 봐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단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성적을 잘 받아야 좋은 대학에 들어가므로 고등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성적에 민감하다. 시험은 '암기능력' '문제 이해능력'이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둘 중에 한 가지만 떨어져도 성적을 올리기는 쉽지 않다. 나 역시 '암기'에는 정말 꽝이었다. 전체적인 큰 흐름을 보면서 암기해야 하는 국사나 세계사 그리고 한문 등의 과목은 제일 싫어한 과목이었거니와 성적도 70점대를 유지했다. 그 밑으로 간 적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하기 싫.었.다. 


대학 입시라는 체제하에 돌아가는 교육 시스템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천천히 바꾸어나갈 수는 있지만 당장 바꾸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게 먼저라고 본다. 고등학생들은 공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지만 그 스트레스를 오로지 공부로만 해결해야 하는, 아무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현실에 더 갑갑함을 느껴 하는 것 같았다. 첫째는 부모님, 둘째는 선생님. 이 두 부류의 어른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접하는 어른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듣는다 해도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다 보면 대화는 이어지지 않는다.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통행이다. 그들의 하소연은 그렇게 시작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라 말은 하지만, 결국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부모님들.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은 학생들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자신의 입을 틀어 막는다. 


학교에 치이고, 학생들에 치이고. 일단 선생님들에게 맡겨진 학생들의 수가 너무 많다. 그리고 선생님들마저도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좋은지 모르는 분들도 은근히('꽤'라고 적었다가 고쳤다. 난 소심하다.) 있다고 본다. 학생이건, 부모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다. 사람이란 끊임없이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부던히 자신을 타자화시키지 않으면 객관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기 어렵게 타고났다. 그런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본인의 사고가 다각화되지 않은 상태라면, 그리고 학교라는 조직에서 월급을 받고 다니는 입장이라면 좋은 가치를 심어주기란 어렵다고 본다. 공무원 월급쟁이가 아닌, 선생님으로써의 역할을 자각해야 하는데 그러한 초심이 있었건 없었건 점점 초심을 유지하기란 어려워진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려운 거다. 책임의식이 필요한 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만큼 책임이 무거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부모님이 어떠냐에 따라,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많이 달라진다. 공부가 아닌 다른 부분에서 재능을 보인 학생에게 칭찬을 했을 경우, 그 칭찬 하나로 어쩌면 학생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아마 좋은 선생님을 만난 학생이라면 그런 경험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난 없다. ㅡㅡ) 그래서 공부라는 하나의 기준에 맞춰 학생들을 순위별로 놓을 것이 아니라, 기초적인 공부 위에 자신의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 역시 전체 대학의 순위가 아닌 내가 가려는 전공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대학을 지원할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한다. 비전이 있는 전공을 선택하고,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학과 이름을 짬뽕해서 개설하는 행태?는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재미없는 과목의 수업방식을 검열해야 한다. 내가 대학교 성적이 안 좋았던 이유는 경영학과의 수업의 반이 '암기'로 이루어져서이다. (이건 99.9% 핑계이다.) 


그래서 좀 안타까운 말이지만, 부모님이 선생님이 죽어라 공부만 시키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라 이야기하는 것도 '몰라서' 그런 거다. 공부를 잘 해서 정해지는 미래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사실 이것도 확률게임), 공부를 잘 하지 못할 경우의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식 잘 되지 않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모르는 미래를 선택하게 했을 때 자식에게 닥쳐올 거대한 풍랑(혹은 잘못될 미래)을 겪게하고 싶지 않은 거다. 안정된 길(하지만 결코 안정된 길은 아닌)로 가게함으로써 부모로써의 안전장치에 최선을 다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80살 부모의 눈에 자식은 60살이 되어도 내 새끼지만, 사람은 의외로 강한 존재라 고통스러운 길을 피하게 만들어주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길을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맞는 거 아닐까? 


우리의 부모님과 선생님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그거다. 그런데 또 문제는 저 마인드가 쉬운 건 아니라는 거다. 저게 또 단숨에 결과가 보이는 것은 아니거든. 게다가 저렇게 하려면 의식수준도 꽤 높아야 한다. 자기 새끼 위에 독수리가 날아다니는데, 자기 새끼가 절벽 근처에서 노는데 그걸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 부모님도 그렇고, 선생님도 그렇고 그렇게 자라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자라지 않았는데 학생들에게 다른 방향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펼쳐주기란 쉽지 않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네가 짊어져야 한다. 라고 말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에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면 독수리가 위협해도 부리로 쪼아댈 수 있는 깡다구를 가질 수 있고, 절벽에서 한 번 날아볼 수 있는 근자감도 키울 수 있다.  


학생들의 성장기는 그렇게 채워져야 한다. 환경이 뒷받침 되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는 말도록. 잊지 않고 있으면 반드시 때는 온다. 그리고 정말 절실하면 스스로 찾아보는 것도 좋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게 수능공부보다 삶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건 내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난 소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존감 회복을 위한 10가지 실천 방법(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