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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미 Apr 26. 2020

비를 피해 들어온 성당에서 쓰는 엽서라니.

그 낭만에 대하여 

비가 올 것 같아 잰 걸음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아니나 다를까 소나기가 쏟아졌다.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이 다시 튀어 올라 종아리까지 적시는 아주 거센 비였다. 


트래킹 일정 없이 작은 도시를 구경 중이라 방수 재킷이 아닌 모직 코트를 입고 있었다. 코트를 입었든 방수 재킷을 입었든, 모자를 썼든 아니든 그 비를 다 맞고 걸어 다니는 아일랜드인의 여유는 없어 성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겁고 뻑뻑한 문을 억지로 열자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보다 더 커다란 소리가 났다. 그 굉음에 지레 놀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시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를 받는 흰머리의 할머니께서 살갑게 안부를 물어보셨다. 아일랜드 날씨 참 이상하지?라는 말과 함께.  


손글씨로 쓴 편지에 담기는 애정은 문장의 길이에 상관없이 어마어마한 것이라 이는 보내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모두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발신지가 멀면 멀수록 반가움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하물며 유럽보다 더 먼 유럽, 아일랜드에서 보내는 엽서라니.  


해외여행을 가면 한 번씩은 누구에게든 엽서를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동행이 있는 경우 이는 쉽지 않다. 엽서를 사는 것부터 우체국에 가는 것까지 모두 양해를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행이 엽서에 큰 관심이 없을 경우엔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된다는 죄책감에 의례적인 안부만 다급하게 묻고 끝낼 때도 있었다. 


절로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화려하고 찬란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줄기는 없었다. 그래서 더 편하게 자리를 잡고 천천히 엽서를 썼다. 


'비를 피해 들어온 성당에서 쓰는 엽서라니 꽤 낭만적이지 않아?' 정도의 표현을 썼던 것 같다. 


두터운 나무 문 너머로 멀리 들리는 빗소리. 아주 조심스레 걷는 발자국 소리. 기껏해야 옷깃이 스치는 소리 정도만 들리는 그 평화로운 적막감 속에서 비로소 '여행지에서 엽서를 쓴다'라는 행위를 해낸 기분이었다. 


물속에 모래가 가라앉듯 느리게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예로부터 성당은 이방인에게도 '쉼터'라더니. 딱 그랬다. 


아일랜드 코크 세인트 핀 바레스 대성당에서. Saint Fin Barre's Cathed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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