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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미 Apr 21. 2020

시간이 멈춘 무덤가에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그야말로 폭우가 쏟아졌다. 얇은 나뭇가지는 단숨에 꺾일 정도의 강풍을 동반한 폭우였다. 이런 날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단 하루도 허투루 쓸 수 없는 성격 급한 여행자는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왕 흠뻑 젖은 김에 1.5킬로 정도 떨어진 수도원 유적까지 걸어갔다.


표지판을 따라 커다란 나무들이 이루는 숲길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회색 벽돌 건물이 보인다. 그곳이 바로 현재까지도 마을 주민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되는 15세기 유적, 머크로스 대수도원이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망자와 몇 세기 전의 망자가 공존하는 곳. 살아있는 사람은 나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는 그곳은 정말이지 이상한 공기로 가득했다. 엄숙한 공기에 짓눌릴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에도 잡히지 않은 채로 붕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주 낯선 곳 같기도 했고 아주 익숙한 곳 같기도 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건물 같기도 했고 그야말로 교과서에 나올법한 아주 오래된 유적 같기도 했다. 문득 아까 본 오늘 날짜가 맞는지 궁금해졌다.


아빠는 가끔 돌아가신 지 오래된 할아버지, 할머니께 식전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자주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신 그분들은 사실 내가 직접 겪었던 추억보다 아빠의 이야기를 통해 더 친숙한 분들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무색하고 희한하게 애정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쌓여 나는 안타깝게도 그때보다 지금 그분들을 더 사랑한다.


순간적으로 할머니 생각이 났다. 언젠가 마중 나오시는 할머니를 보고 '버선발로 뛰쳐나온다'는 얘기는 할머니를 두고 만들어진 말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먼 곳에 와계실 리 없는데 와주신 것 같았다. 예전처럼 뭐 하고 밥 먹을까? 물으시는 것 같기도 했고 감기 걸리지 말라고 어깨를 다독이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의 경계선이 바스러져 빗물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일랜드 머크로스 애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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