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고대의 유물
발전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간에도 생각은 유동적으로 병합되어 정제된다.
여태까지 그림을 어떻게 그려올 수 있었는지
어떻게 꿈을 놓지 않고 있을 수 있었는지
한 번 더 정리되고 있는 시기다.
미술을 꾸준히 해오면서 성과가 없었을 때
당시엔 해결 방법이라 인지하지 못했지만, 유지를 하게 만들어 준 본능적인 행동들이 있었다.
환경설정이다.
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본다.
미술학원을 못 가는 환경일 때 1.5평 남짓한 방에다가 석고상, 이젤, 등 소묘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다 놓았었다.
운 좋게도 우리 동네에는 버려지는 석고상이 종종 나와 있었다.
석고상을 물로 오래 닦아내다 보면 조금 녹기 시작하는데, 새것과 다름없이 하얗게 만들 수 있었고 그렇게 석고상 종류를 늘려나갔다.
석고상을 올려놓아야 하는 석고다이는 구하기 힘들었다. 책상 위에 교과서 등 안 보는 책을 높이 쌓아 올려 석고상을 거치했고, 부족했던 광량을 채우기 위해 천장에는 스탠드를 테이프로 감아놓기도 했었다.
방안에는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없었으며, 라디오 한 대만 있었다.
눈을 뜨고 있으면 그릴 수밖에 없는 환경을, 강제적, 타의적, 자의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돌이켜 보면, 다른 것들은 못 지킨 게 너무 많지만, 항상 그 환경만큼은 계속 가져왔었다.
보상이 존재하지 않아도 항상 그릴 수 있게 세팅이 되어 있기 때문에, 깊은 사고나 생각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습관처럼 그릴 수 있었다.
반복되다 보니 초반에 안 그리게 되었던 날은, 죄지은 것처럼 괴롭고 허하기도 했다.
석고소묘 완성작 90%가 학원이 아닌 그 방 안에서 나왔다.
이런 습관이 들기 시작한 지점부터는
'힘들다'라는 생각이, 적어도 현재의 나에겐 사치라고 느껴졌었다.
비교적 미술을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당시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재능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힘들어할 시간조차 줄여야 한다고 매일 다짐했다.
멘탈리티 부분에서 사람의 본질은, 누구나 비슷할 것이라고 설정했다.
내가 힘든 구간에서는 남들도 힘들겠구나
남들이 쉬게 될 수밖에 없는 지점에서 나도 같이 쉬면 뒤처져 있는 간극을 절대로 줄일 수 없겠구나
그것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진실이라 여기며
그리기 싫은 날, 몸이 아픈 날, 집중력이 아예 없는 날, 기력이 없는 날, 명절, 휴일.
상관없이 365일 내내 이젤 앞에 앉아있었다.
효율이 높지 않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또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오프라인 작업실 다니는 분 중에도, 내가 추구하던 이 방식으로 방안에 세팅을 해놓고 다니시는 분들이 계신다.
물론 강요는 전혀 없다.
좋은 것은 스스로 찾아 해나가는 것이 선순환의 시작점이다.
과학적인 원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원초적인 구시대 방식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결론적으로 그 어떤 방식보다도 효율이 높았었고, 파생되는 장점만 나열해도 책 전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리는 양과 상관없이 방 안에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놓은 것은, 가장 큰 도움이 되는 방법임을 확신한다.
한계점이 너무 오래 지속될 때는,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대화도 많이 해봤다.
견학 다니듯 그림을 잠시라도 그려 볼 수 있는 곳을 방문한다거나, 문하생처럼 그 공간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기도 하기도 했다.
항상 스스로 자극이 될 만한 동기 요소들을 파악하고, 찾아보고, 갖춰놓는 것이 참된 환경구성이다.
실패를 크게 경험했을 때 개인의 경험과 의지만으로는 넘어서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다면, 바로 습관이다.
오로지 습관만이 내 상황, 상태, 감정 기복 등에 영향을 덜 받으며 움직이는, 유일무이한 삶의 요소가 되어준다.
미술이 아니어도 다른 분야에서 잘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습관이라는 공통 분모가 거의 다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이런 공통 분모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효율 높은 정답을 판단하고 근접해 갈 수 있다.
아,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하면, 최소한 망하지는 않겠구나
일정 기준선을 잡고 나아갈 수 있다.
사실 쉽지 않다.
그림으로 사회적인 1인분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과정이 꽤 막연하고 쉽지 않다.
잘 풀리는 경우들은 남의 일 같기만 하다.
잘 그리기만 해서도 안 된다.
학력이 좋아도 장담할 수 없다.
돈이 많아서 잘 풀리지도 않는다.
변수가 너무도 많아 확정 지을 수 없는 일이다.
변수를 극복할 방법은 다른 일보다 그림을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구태의연하지만 진리에 가깝다.
이것이 성립된다면 어떤 상황이 와도, 누군가 뜯어말려도 계속 그림을 붙잡고는 있을 것이다.
붙잡고 있으면 되긴 된다.
너무 막연해 보이지만, 붙잡는 것은 상황마다 그릴 수 있는 환경을 구성해 나가고 있다는 함축적인 뜻이 담겨있다. 그 긴 과정을 겪다 보면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임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그림을 정말 좋아해야 한다.
결과에 대한 보상의 크기는 작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든지 눈덩이처럼 거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
버팀은 작은 스노우볼을 굴리는 일의 연속이다.
습관이 스며들 수 있는 나만의 환경을 만들어 놓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림을 좋아하는 마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법들은 앞으로 계속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