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충
가벼움은 늘 옳지 않았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때 등 '가볍게 해라' '조금 내려놓고 해 봐' 등의 조언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이 말들을 처음 들었을 때는, 생각을 줄이고 편하게 대충 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였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무거워지고 될 일도 안 되니, 순간적인 빠른 판단으로 즉흥적이게 행동했었다.
내면에 쌓아놓은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고, 가볍게 하려 했는지 몰랐던 행동들이었다.
가벼움을 풀어 해석해 보면, 몰입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라는 의미다.
크게 막혀 있는 길을 급하게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전체 길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워보는 여유다.
이런 의미들을 몰랐기에, 조금이라도 복잡하고 무거워지는 것들을 회피해 왔다.
가벼움을 위한 가벼움은 늘 옳지 않았다.
나는 진지함이 부끄러웠다.
진지충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을 비판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단어다.
상황상의 흐름을 못 좇아가고, 가벼운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사회성과 눈치를 챙겨 상황 판단을 잘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자기 분야에서만큼은 진지충이 되어야 한다.
'충' 자는 빼는 것이 좋겠다.
그냥 진지한 사람.
현재는 차분하다, 로봇 같다, 과묵하다 등의 얘기들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말도 안 되는 까불이였다.
가벼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무거움은 애써 회피하기도 했고, 남의 눈치를 굉장히 많이 보기도 했다.
진지한 말들에 상대방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게 될지 걱정했고, 그 반응들에 대해 예민했다.
그러다 보니 해야 할 말도 잘 못하고 일부러 나를 희생해 분위기를 띄우거나, 가벼운 농담들을 나오는 대로 무수히 많이 던졌다.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도 가볍게 행동해 왔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는다면, 주관이 흐려져 주변 상황에 맞추게 된다.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다.
사적인 대화에서 그림에 대한 고민이 있어도 풀어놓지 않고, 간혹 그림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그냥 대충 되는대로 하고 있다’ ‘나도 잘 모른다.’ 식으로 대답해 왔다.
그리는 순간만큼은 나름 진지했지만, 그림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싫었고, 그 느낌을 말로 표현하기 굉장히 부끄러웠다.
상대방이 혹여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무거워지는 공기가 싫었다.
말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열심히 하는 척으로 보일까 봐 피했다.
그래서 열심히 하지 않는 척을 했다.
초반에는 분야에 대한 자신감도 떨어지고, 막막한 앞길에 휘둘리며 자연스럽게 생각도 짧아졌다.
자신과 상황에 대한 회피이자 가벼운 허세를 부려온 것이다.
약점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로 더 가볍게 말하고 행동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에,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
전체적으로 어설픈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뒷이야기 들은 그동안 이 책에 작성한 내용들과 같다.
그림을 깊이 파고들수록 많이 깨지고 넘어지는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생각과 마음들이 점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가벼운 말과 행동들도 점차 조심스럽게 바뀌었다.
속과 다른 말을 하며 자신감 없는 모습들이 득 될 건 없었다.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눈치를 보지 않고, 주관대로 말을 할 수 있어야 상황이 바뀐다.
진지함은 부끄러운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상황은 맞추는 것이 아니라 끌어와야 한다.
한 분야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수 있으려면 전문가가 돼야 하고, 이상적으로 전문가는 그 분야 자체여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이 부분을 갖춘 사람들의 공통점은 매우 진지하다.
실생활은 기본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야에서만큼은 진지하다.
가벼운 논쟁도 3박 4일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다.
가벼움은 분야를 이해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지함은 하나의 벽을 넘기 위한 필수 소양을 담은 자세이기에,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현재의 완성도를 떠나, 성장 과정부터 진지한 것만큼 멋있는 것이 없다.
주체적으로 이뤄나가려는 열정이 강하게 느껴져 상황을 끌어오는 믿음이다.
그것이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만든다.
진지함을 기반으로 진중함을 얹어 집중해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