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배신
경력이 능력을 대변하진 않는다.
이 내용을 작성하는 시점에 나는,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19년 차다.
미술을 시작하며 막연히 생각해 봤을 때, 20년 후쯤 나의 모습이 그림 장인에 가까워져 있길 바랐다.
까마득히 먼 시간의 범위를 봤을 때, 흘러가다 보면 자연스레 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실력이 향상될수록 목표치도 같이 상승하여, 장인의 기준이 한없이 높아져 간다.
'10년, 15년, 20년, 30년 이상 그렸다'라는 배경이 있으면 보통 굉장한 기대치를 갖게 된다.
그런데 장인에게 그 믿음을 배신당해 본 적 있는가?
경력이 길다면 당연히 실력이 좋으니, 오래 해왔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꼭 그렇지 않음을 일상생활 속에서도 경험해 보며, '속았다', '이상하다'라는 당혹스러움을 느껴본 경험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런 사례들이 생기는 이유를, 크게 네 단계의 성장 과정으로 압축시켜 풀어 본다.
성장기, 안정기, 전문가, 장인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일반 기준으로, 성장기에서 안정기에 가까워지는 시간은 하루 8시간씩 투자기준 약 2년 정도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을 때 적용되는 기간이다.
2년 동안은 실력 상승이 눈에 띄게 보이며, 방향에 따라 안정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
안정기는 가시적 영역 성취의 종착지를 말한다.
가시적 영역 성취의 종착지는, 일반적인 분별력 안에서 임계점으로 보이는 성취도다.
한 장르에서 많은 경우의 수를 활용할 수 있고, 기복이 크게 줄어들면 안정기에 도달한 것이다.
이 영역에 도달하면 능력치가 표면적으로 부각되기에, 본인의 분야를 제삼자가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안정기 이후부터는 전문가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전문가 영역은 연습해 온 장르에 직업이 연결되어 있거나, 이론과 방법들을 실용적으로 정리해 놓은 상태를 말한다.
이 영역부터는 성장 가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하며, 성취도 종이 한 장 차이처럼 매우 미세해지는 단계다.
성취에서 막혀있는 벽 하나를 넘어가기 힘들고, 노력 대비 능력의 상승 폭을 기대하기 어렵다.
장인의 영역은 분야별로 극소수만 도달할 수 있으며, 기간으로 규정할 수 없다.
좋은 방향과 노력만으로 가능성을 설명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분야의 이해도가 정점을 찍으며, 이론과 방법들을 새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단계다.
존재 자체가 굉장한 희소성을 지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작성하겠다.
나와 다른 분야를 다루는 사람들을 일반인이라 규정해 보자.
일반인은, 안정기, 전문가, 장인의 영역을 확실하게 구별하기 힘들며, 모두 비슷하게 느낀다.
구별이 힘든 점을 악용하여, 어떤 분야의 장인으로 마케팅하는 경우가 꽤 많다.
십중팔구 장인은커녕, 안정기 영역도 맛보지 못한 경우들이 많으니 주의하자.
이제 장인의 영역은 논외로 둔다.
연습 기간과 상관없이, 각 영역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들에 대해 분석해 본다.
연습 기간보다 휴식기가 더 긴 경우들은 제외한다.
오랜 노력을 투자했어도 방향이 잘못 설정된 경우다
다음 실제 사례들을 참고해 보자.
30년 동안 고대 무술을 연마해 온, 무협지에 나올 법한 고수가 있다.
실전 경험은 아주 적지만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해오며, 오랜 기간 수련해 왔다.
자신만의 스타일과 방법들을 조합하고 창조했다고 주장하는 등 자부심이 대단하며, 그를 따르고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까지 거느리고 있다.
높은 명망을 앞세워 자신이 최강이라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주장하는 대로 역사상 최강의 무술 고수로 남을 수 있었을까?
자신감 넘치던 그는 문파 제자들과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종합격투기 룰로 경기를 치르게 된다.
상대는 2년 정도 MMA를 수련한 아마추어 선수였다.
무술가는 상대의 공격을 쉽게 허용하며, 시뮬레이션과 다른 실제 아픔에 매우 당황했다. 평소에 사용하던 무술 동작도 모두 무너지며 막싸움을 벌이게 된다.
결국 모두가 보는 앞에서, 1라운드도 못 버티고 처참하게 쓰러지는 안타까운 결과를 남기게 된다.
30년의 수련자가 2년 수련자에게 패배하는 것은, 투기 종목의 특수성일 수도 있다.
경쟁이 아닌 자신을 찾아가고 표현해 나가는 미술의 성격과 꽤 거리가 있다.
단일 예시로 장르의 방법론을 통일시켜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사례에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잘 담겨있다.
실용성의 차이다.
장르마다 룰은 다르지만, 전문성을 지니기 위한 하나의 관문이 있다면, 분야를 관통하는 실용성의 존재 여부이다.
사례로 다룬 무술가와 MMA 아마추어 선수는 서로 다른 목적이 있다.
무술은 심신을 단련하여 자신을 이겨내 나가기 위함이고, MMA는 서로를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무술가는 자신이 최강이라 주장함과 동시에, 두 장르를 상위 카테고리인 '투기 종목'으로 병합시킨다.
결국 MMA가 무술보다 투기 종목에서 높은 실용성을 갖기에, 불 보듯 뻔한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이다.
분야별 적용되는 실용의 개념은 직관적이고 효율적이며, 시대를 아우르는 정보로써 체계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이렇듯 경력과 상관없이 실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해, 안정기에 접어들지 못하고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사례들은 흔하다.
이번엔 직접 체험해 본 경험담이다.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미술 학원에 다니게 되었을 때다.
학원 안에서 알려주는 방식들을 토대로 많은 연습과 응용을 해봤지만, 전혀 실력이 늘지 않았다.
이론과 방법들의 근거가 매우 빈약했기에, 그저 오래 앉아 반복 연습만 해나갔다.
그 무렵, 다른 학원에 잘 그리는 선생님이 계신다는 소문을 듣고 견학을 가봤다.
좋게 말해 견학이고 사실 동냥 가는 심정이었다.
그 학원에서는 나와 같은 입시생뿐만 아니라, 일반 중학생, 예고생들도 정말 좋은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머리를 쥐어 짜내도 생각하지 못할 법한, 처음 보는 스타일과 방법들을 적용해 막힘없이 그려내고 있었다.
한쪽 벽에는 그 당시 기준으로 판단했을 때, 놀랄법한 수준의 그림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그런 공간에서 그림은 원래 그래야 한다는 듯, 모두가 당연하게 그렇게 그리고 있었다.
높은 기준이 당연한 듯 설정되어 있으니, 전체 하향선이 낮지 않아 평균치도 높았다.
한치에 과장 없이, 내가 다녔던 학원 선생님 연구작이 그 학원 학생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20년 넘는 경력자가 예고생보다 낮은 이해도를 갖고 있는 것이 가능했다.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미술에선 꽤 흔한 일이었다.
'노력의 양을 떠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10년 20년 30년 꾸준히 해도 안 되겠구나.'
큰 심각성을 느끼게 되었다.
같은 노력을 해도 공간 레벨에 따라 큰 차이로 나뉠 수 있다.
그 비슷한 시기에, 전국 레벨에서 손꼽을 만한 천재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있었다.
우연히 그림 얘기를 하게 됐는데, 의외로 단순했다.
노력을 떠나 원리에 대한 근거와 체계가 끊겨있고, 가벼운 판단들로 이루어진 내용들이 대화에 묻어 있었다.
기본기와 거리가 먼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떻게 잘 그릴 수 있었을까?' 관찰하고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천재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는 기술적 피지컬이 좋았고, 숙련도를 채워온 시간이 길었다.
단순히 기술과 숙련도만으로 가능한 영역일까?
체계가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아도, 기술 방향이 실용성과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모든 기술의 시작은 원리와 근거 기반이지만, 전달 과정에서 원리와 근거에 대한 소실이 일어날 수 있다.
전해 내려오면서 기반이 사라지고 기술만 남는 경우다.
이런 기술이 적용되면 50m 달리기와 같은 빠른 스퍼트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인생은 마라톤이며 아무리 잘 봐줘도 최소 100m 달리기다.
기술 안에 숨겨진 의미를 해석해 내지 못한다면, 50m 이후 체력과 속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100m 도착점에서는 뒤처지고, 마라톤은 완주하기 힘들다.
천재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는, 실용성 높은 기술의 일부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익혀왔다.
그렇게 50m 달리기로도 충분했던 입시 미술에서는 뛰어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기반이 사라진 실용성조차도, 평범한 사람을 잠시나마 천재로 느껴지게 할 만큼의 위력을 지녔다.
기반이 탄탄한 실용성이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런 사례들은 경험의 극히 일부분이다.
경력이 오래됐는데도 실용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그만큼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은, 실용성 부분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필요성은 존재의 감지로부터 발현된다.
그나마 경력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점은, 쌓여있을 숙련도다.
무조건 일반인보다 조금 나을 정도는 확실하다.
그림에서 숙련도는 성장기에 많은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이고, 안정기만 넘어가도 비슷비슷해지면서 성장기 때 보다 영향력이 점점 작아진다.
그림은 숙련도가 안정화되어 감에 따라, 설정에 맞는 원리들을 자유롭게 세팅하여 사용할 수 있는 능력들이 큰 영향력을 가진다.
그렇기에 실용성이 배제된 숙련도는 큰 설득력이 없다.
경력이 아닌 이해도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양과 질이 동시에 높아야 함을 명시하며, 실용에 대한 소개는 마친다.
만들어 내는 방법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쭉 다뤄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