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의 파편
생각과 말이 인식에 끼치는 영향력은 거대하다.
소재에 디테일이 복잡하고 그릴 요소들이 많을 때, 반복적인 패턴이 있을 때 '노가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미술을 배울 때도 디테일한 부분에 어려움을 겪을 때, 많은 양을 어떻게 그려낼지 막연할 때 "이건 그냥 노가다야."라며 표현 위주의 교육을 받은 적이 많다. 미대에 진학해 전공수업을 들을 때도 예술성과 창의력을 강조하며, 사실적인 표현이 노가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이 내용들을 배우면서 성장하는 학생들은 디테일한 요소를 그리게 되었을 때, 노가다라고 생각하며 그릴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나 역시 그 학생 중 한 명이었으며 아무 생각 없이 표현 위주의 반복 작업만 해왔던 기간이 꽤 길다. 다행히 연습 과정에서 '노가다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안 되겠구나.'라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다.
노가다(どかた)는 일본말로 일을 반복하거나, 힘들고 고된 일을 뜻한다. 막일, 막노동, 노동자를 뜻하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다. 보통 이 단어를 인식할 때는, 반복하면서 힘들고 지루한 일로 여긴다.
그림 안에서 노가다라는 부분을 잘 생각해 보면, 이미 파악한 구조에서 그려야 하는 양이 많을 때다. 반복되고 지루하며 남은 부분의 처리방식이 다 같을 것 같아서, 시간문제라고 생각되는 경우 노가다라고 인식한다.
AnT 작업실은 방문 상담을 필수로 진행하는데,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을 쭉 보며 얘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다. 평균 20분에서 1시간 정도면 방문자가 어느 정도 그릴 수 있는지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그림에 표현할 수 있는 양은 말하는 것에 반도 안 되고, 말하는 것은 생각에 반도 안 되며, 생각하는 양은 해석한 양의 반도 안 되기 때문이다. 언변이 화려하지 않은 정도를 감안하고서도 선택한 단어, 얘기의 배경, 판단을 종합해 봤을 때, 어느 정도 그림을 그려봤고, 어느 정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림에서 노가다는 어떤 기저에서 나오게 되는 말일까?
단어 선택은 연구의 흔적과 파편이다.
베껴 그린다. 그대로 그린다. 사진처럼 그린다. 이 방식들은 모방의 개념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만드는 목표를 가진 구상 미술은 해석하는 과정이 항상 필요하다. 내가 바라본 대상을 다각도로 해석해, 평면 공간에 만들어 낼 계획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노가다라는 단어에 이런 개념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다. 반복되고 고된 행위의 뜻이 강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림에 적용되면, 주도해서 그려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인해 성장 폭이 굉장히 좁아진다. 연습을 많이 해도 숙련도가 붙는 정도로 그치게 되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 기본 바탕에 깔리게 된다. 그로 인해 그림을 대할 때 항상 가벼울 수밖에 없다. 가볍다는 것은 쉽게 말해, 해석이 크게 담기지 않으며 표면적인 것에 휘둘리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이 밖에도 그림에서 개선되어야 할 가벼운 단어와 표현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노가다는 큰 위험성을 지닌 가벼운 단어 중 하나다. '노가다' 단어 정도의 가벼움은 1권에서도 다루었던 '대충'을 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소재의 반복된 규칙과 디테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려야 할까?
여러 가지 개념들과 방법들이 많지만, 한 가지 생각을 통해 생각보다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다. 그림은 자신을 나타내고 내면을 표현해 감정을 해소해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설득력도 중요하다. 보는 사람들 입장을 고려해서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잘 설명해 준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정성스럽게 하나씩 만들어 나간다.
규칙성이 있는 소재들도 자세히 관찰하면 조금씩 다르게 생겼다. 빛과 시점의 변화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또한 다양하다.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내 전달하는 것은, 꼭 연습해야 할 디테일이다. 설득력 있는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작은 인식의 변화로 큰 개선점을 찾아보자.
노가다라고 생각하고 그리면 노가다로 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