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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앤트 Oct 24. 2023

고대비

저대비

고효율의 효과가 항상 정답이 될 수는 없다.


대비 높은 소재들을 그림에서 치트키와 같다. 실패할 확률이 적은 안전한 요소로 그림이 수월하게 풀리며 결과물도 비교적 임팩트 있게 만들어진다.

나는 그림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되는 자리나 상황이 되면, 대비가 높은 그림보다 대비가 낮은 그림을 기준으로 본다. 그 이유를 풀어본다.


대비가 높은 소재라는 것은 빛을 받는 영역과 못 받는 영역의 차이가 심하거나 포인트가 알기 쉽게 강조된 경우를 얘기한다. 디자인 개념에서의 대비는 서로를 상쇄시키는 것이 아닌 돋보이는 역할을 하지만 회화에서는 시각적인 강조의 역할만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소재를 살펴보다 보면 일정 부분 견적을 뽑을 수 있다. 그리기 까다로운 소재는 대비가 약하고, 그릴만 한 소재는 대부분 대비가 강하다. 대비 차이가 강할수록 시안성이 높기 때문에 1차원적으로 접근하기 쉽다. 그대로 그리는 방식으로도 결과물이 그럴듯하게 나온다. 

처음에 그림을 시작할 때는 세게 그리는 습관을 대부분 갖고 있다. 색도 원색으로 채도 높게 쓰게 되고, 명도도 흑과 백처럼 고대비로 단순화하여 판단한다. 강조하거나 자세하게 그리고 싶을 때도 강한 표현으로 진행하게 된다. 대비가 강한 소재들은 빛을 적게 받는 어두운 부분만 강하게 그려도, 스포트라이트 받은 것처럼 고대비 효과를 지닌 입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진다. 그래서 난이도가 굉장히 낮은 편에 속한다.

강한 표현 방식은 누구나 겪게 되는 초반 과도기로, 그려내야겠다는 마음이 앞설 때 나오는 본능이다. 이런 심리들을 바탕으로 대비가 약한 소재들은 그릴만 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그림을 연습하는 과정에서 빛과 구조를 익혀나가기 위해 쉬운 소재들을 많이 선택한다. 직관적이기 때문에 바로바로 눈에 띄는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 그려 놨을 때 현재 성과와 들인 시간에 비해 가장 효과가 좋고 임팩트도 강하다. 이런 부분 때문에 대비 높은 소재들만 계속 그리게 되는 함정에 빠지곤 한다.


나아지기 위해 대비를 줄여나간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27.2x37.2cm, 도화지에 연필, 2018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대비가 강하게 생기는 상황들이 그렇게 많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정적인 상황, 공간, 빛에서 발생하는 이벤트가 강한 대비다. 

자연스러운 느낌을 만들려면 평소에 더 많이 접하고 있는 대비가 적은 상태. 저대비 상황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흑과 백이 아닌 회색톤 안에서 작은 단계들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단계를 중간톤이라 말한다.

중간톤의 색과 명도 단계는 눈에 확연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초반에 판단하기 어렵고 계획이 잘 세워지지 않아 굉장히 꺼려진다. 들인 시간만큼 시각적인 효과도 고대비 그림에 비해 적게 나온다. 하지만 저대비를 잘 표현할 수 있으면 그릴 수 있는 영역은 훨씬 늘어난다. 그리고 그리는 방식과 체계가 꽤 깔끔하게 정렬된다.

 

대비 높은 소재만 그려오다가 대비 낮은 소재들을 들어갔을 때 속절없이 무너진 기억이 많다. 한두 번 무너지는 것이 꽤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섣불리 그런 소재들에 접근하거나 다루지 못했었다. 

극복하여 저대비 소재들을 다루기 시작한 이후부터 그동안 익혔던 빛과 구조의 개념이 크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미세한 차이로도 입체감을 낼 수 있었고, 짜임새 있게 마무리를 해놓으면 대비가 높은 그림보다 사실감을 만들기 더 용이했다. 그 임팩트는 강조가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표현되어 더 높은 수준의 그림을 만들 수 있다. 


김앤트, 시범 프로세스, 37.2x27.2cm, 도화지에 연필, 2019


이런 이유로 대비가 높은 그림은 왠만하면 평가하지 않는다. 요령이 조금만 붙어도 이해도를 가릴 수 있는 소재이기 때문에 정확한 평가와 판단이 어렵다. 평가의 장에서 고대비의 소재는 예선전이라 생각하며, 예선전을 통과했을 때 저대비 소재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여기까지 통과하면 그다음 스타일과 컨셉을 보기 시작하는데, 이 부분은 나중에 다루기로 한다.

여러 가지 상황과 소재를 다양하게 다뤄보는 것이 고립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대비 높은 소재를 잘 그릴 수 있다면 낮은 대비를 가진 소재도 계속 연습해 보자. 이해도가 꾸준히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이 뒷받침되지 않는 컨셉은 다른 장르로 분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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