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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기 Feb 18. 2020

격정적으로 불타버린 사랑의 온도

남과 여

사랑은 타이밍이다. 손뼉도 마주치듯이 사랑도 마음이 맞아야 한다. 흔히 남자와 여자를 화성인과 금성인에 비유하고는 한다. 서로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듯 그 시기와 과정 또한 차이 날 때가 많다. 이런 시선을 약간 비틀어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쉽게 방황에 접어들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이 한 편 있다. 그 환경이 계속해서 극단으로 치달을수록 남녀는 서로의 존재를 더 인정하고 그를 위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 나간다. 문제는 두 마음이 손뼉이 맞아갈수록 계속해서 엇박자가 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서로를 바라보는 동일한 시선을 제각기 다른 방향에서 그려본 영화,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2015)이다.



영화는 핀란드 헬싱키의 어느 마을에서 아이를 돌보고 있는 상민(전도연 분)과 기홍(공유 분)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두 사람 모두 아이들을 국제학교에 보내고 있지만 상민의 아들 종화(노강민 분)는 발달장애를, 기홍의 딸 유림(강지우 분)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아이들을 돌보며 겨울 캠프에 보내는 도중 우연히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종화를 혼자 떠나보내는 것을 걱정하던 상민의 부탁으로 두 사람은 캠핑장까지 동행하게 되고, 폭설로 도로가 끊어지자 같은 숙소에 함께 머무르게 된다. 처음 만난 이들이었지만 서로의 상황에 이끌린 두 사람은 첫 정사를 나누게 되고 그렇게 서로의 이름도 모른 채 헤어진 후 또 다시 시간이 흐른다.


8개월 후 서울로 돌아온 상민은 핀란드에서의 일을 까맣게 잊은 채 일상에 빠져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어느 날 갑자기 기홍이 다시 나타난다. 그녀의 일상을 통째로 흔들어버릴 만큼의 큰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말이다. 영화는 가정을 가진 두 사람이 각자가 처한 힘든 환경 속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소개한다. 영화의 첫 화면은 두 사람이 항상 피곤에 절어있는 모습이다. 마치 뭔가를 갈망하고 있지만 답답하게 쌓여만 가는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그 답답하고 꽉 막힌 속내를 상민은 그나마 담배로 뱉어내고 다시금 입에 머금어낸다. 이렇게 불안정한 상황에서 만난 두 남녀의 방향은 어디로 흘러갈까?



두 남녀의 정신적 방황을 화면은 눈 내리는 아름다운 핀란드의 마을과 함께 차분하게 담아낸다. 눈이 내리고 돌아가는 길에 도로가 통제되어 고립되자 두 사람은 숙소에서 하루를 머무르게 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는 두 사람. 그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시선이 그의 뒷모습에 머무는데 그녀의 관심이 점차 그에게로 향함을 표현하기 위해 카메라 워크가 핸드헬드 기법을 잠시 사용해 마음과 시선이 요동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이내 그 또한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이 머물면서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는데 두 사람의 감정 표현을 자연스런 카메라 워크로 표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선을 반복해서 넘나든다. 종화의 캠프를 따라가는 건 현실의 반복이고 기홍과 숲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우나에서의 첫 정사는 현실을 도피하고픈 그들의 이상이다. 다시 서울로 돌아와 기홍은 계속해서 이상을 좇고자 상민을 마구 흔들어댄다. 늦은 저녁 사무실에서 두 번째 정사씬을 보일 때도 결국엔 종화의 방해로 이상에서 현실로 곧 넘어오고 만다. 기홍의 마음과 달리 상민은 이 꿈같은 현실이 두렵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옆에 아이가 없었음을 알아채고 이래도 되나 아이가 없는 삶은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얘기하는 장면은 결국 쉽게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민의 두려움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말이다.



영화는 속도를 조율할 줄 안다. 스토리 전개를 빨리 가져가 기홍이 상민에게 빠져듦을 뜬금없이 앞당기기도 하다가 상민이 기홍의 적극적임에 마음을 여는 속도를 조금씩 천천히 꺼내들고 있다. 마치 사랑에 금방 불이 붙는 남성의 뜨겁고 격정적인 성향과 천천히 강하게 타오르는 여성의 사랑 방식을 드러내기라도 하듯이. 그 만큼 천천히 타오른 상민의 사랑은 쉽게 가라앉지 못한다. 종화의 신발이 파도에 떠내려갔을 때의 기억을 얘기하면서 아이한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말하고, 냇가에 신발을 던져 다시 주어온 후 이제 그 나쁜 기억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사실 종화가 아닌 상민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말이었다. 이내 ‘잊을수록 좋은 기억도 있다.’고 말하는 상민의 모습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왔음을 대신 표현한 마음을 꺼낸 거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홍이 그들을 바닷가로 데려갔을 때 ‘우린 만날 때마다 어디를 여행하는 거 같아요.’, ‘돌아가지 말까요? 농담 아닌데.’라며 살갑게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미 경계선을 넘어버린 모습이다.


그렇게 잠시 짧은 여행을 하고 돌아왔는데, 가정에는 변화된 모습으로 자신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각자의 배우자들이 있다. 갑작스런 바다여행을 이해해주고 종화의 건강을 걱정하는 남편과 기홍의 입장을 이해하며 그 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진지하게 고민해준 그의 아내. 기홍은 그 순간 뭔가에 크게 맞은 듯 아내의 입장에서 그녀를 바라보려 생각한다. 그녀가 위험하게 올라갔던 담벼락 모퉁이에 위태롭게 서서 다시 한 번 이 상황을 돌이키려 애를 쓴다. 그 때 그의 딸이 나타나 아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음은 아빠를 떠나보내기 싫은, 그래서 우울증마저 넘어설 수 있는 짧고도 굵은 아이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때 딸을 끌어안은 기홍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음은 내가 잠시 잘못된 길에 접어들었구나를 깨닫게 만드는 후회의 흔들림이다. 



하지만 상민의 사랑은 이제 불타올랐다. 상민은 기홍의 마음을 확인했다고 스스로에게 확신을 가진 채 그녀의 남편에게 선뜻 기홍의 존재를 언급한다. 농담처럼 남자가 생겼냐고 물어봤던 그녀의 남편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건 물론이다. 하지만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가고 그는 그녀의 문 앞에 이르러 선뜻 문의 손잡이를 돌리지 못한다. 사랑은 타이밍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어긋남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상민은 남편과 헤어진 후 혼자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핀란드로 다시 떠난 기홍을 찾아간다. 자신의 마음을 격정적으로 흔들어댔던 그는 가족과 함께 너무나 잘 지내고 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택시를 타고 다시 돌아선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린다. 현지인 기사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잠시 택시를 멈추고 그녀에게 시간을 양보함은 상민에게 허락된 최소한의 공간이자 시간이다. 택시에서 다 울고 난 후 차에서 내려 택시기사와 함께 담배를 나눠 피우는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의 백미다. 그렇게 영화는 남과 여의 달라진 상황과 차이를 보이는 사랑의 과정, 그리고 결과의 아픔을 색다른 시선으로 그려낸다. 여민 가슴은 그렇게 아팠다. 두 사람의 사랑을 바라본 관객의 마음도 그렇게 아팠다. 영화 <남과 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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