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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기 Feb 21. 2020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남산의 부장들

역사는 역사 속에 묻힐 가능성이 다분하다. 역사는 진실과 거짓을 함께 품고 있기 때문이다. 진실도 거짓도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여진다면 결국 역사는 그 자체로서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 무엇보다 우리의 현재와 앞으로의 미래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도 해내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민호 감독은 이 영화에 분명한 자신만의 메시지를 담았다. 영화가 수없이 많이 다루어진 실화를 똑같이 조명하고 있음에도 식상하기보다는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물론 익숙한 소재가 관객들에게 구색 맞추기에 그칠 수 있는 우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긴 시간의 러닝 타임동안 연기력 하나만으로 버텨왔던 승부수를 마지막에 폭발시킨다. 한 마디로 응축된 힘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메시지가 존재했다는 거다. 그게 적어도 이 시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 영화 <남산의 부장들>(2020)이다.



1979년의 10.26사태는 중년층 이상의 국민들에게는 어느 정도 익숙한 얘기이다. 직접 동시대를 살았거나 간접적으로 겪어 보았거나, 혹은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매체를 통해 재조명된 바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대부분은 임상수 감독의 2005년 작, 영화 <그때 그 사람들>(2005)을 떠올릴 것 같다. 분명 동일 사건을 배경으로 이를 새롭게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해학적으로 풀어낸 건 사실이다. 실상 아무도 당시의 상황에 대한 진실을 알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벌어진 사건이라는 팩트만 존재할 뿐 숨겨진 진실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걸 감안한다면 이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다루어질 여지가 충분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 거는 개인적인 기대가 큰 것도 사실이었다.


필자는 오히려 2005년에 방영됐던 TV드라마 <제5공화국>을 쉽게 떠올렸다. 시리즈의 도입부가 바로 이 10.26사태가 벌어지면서 시작되기 때문인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드라마라는 장르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작품이라고 본다. 훨씬 깊이가 있고 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다. 거기에 출연진들 대부분이 각자가 맡은 역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점이 눈에 띈다. 당시의 사건을 해석하고 그 상황에 빠진 인물의 고민과 행동의 당위성을 드러내는데 노력했다. 그게 필자의 기억 속에 여태껏 이 작품이 남아있는 이유이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이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그 정도의 깊이를 드러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감독의 사건에 대한 시각과 해석, 이를 통한 분명한 메시지를 표출시키는 데는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배우들의 연기는 충분히 출중하다. 특히 현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 분) 역을 맡은 배우 이병헌의 연기력은 그가 오랫동안 쌓아온 노련미답게 충분히 출중했다. 하지만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의 최명길 역과 같은 스펙트럼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게 흠이 됐다. 당시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수장치고는 강한 힘과 카리스마를 화면 속에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경호실장인 곽상천(이희준 분)의 간접적인 공격과 공작에 그는 맥없이 무너진다. 사실이 그랬을지라도 이에 대한 그의 분노 정도는 화면에 제대로 표출되었어야 했다. 그게 감독의 표현 방향과 관련이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는 생각 외로 너무나 얌전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너무나 부드러운 화를 드러낸다.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해석할 줄 아는 성격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는 그러면 안됐다. 누구보다 그는 누구나 무서워 벌벌 떤다는 그 유명한 남산의 부장이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배우들은 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며 제 역할을 딱딱 맞췄다. 배우 이희준의 발견은 이 영화의 색다른 볼거리이다. 김규평의 심기를 간질거리며 조금씩 건드리고 이와 동시에 박 대통령의 곁에서 온갖 아부를 해대는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줬다. 거기에 박 대통령 역할을 맡은 배우 이성민과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 역을 맡은 배우 곽도원은 자신의 위치에서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적절한 연기를 펼쳤다. 박 대통령이 수하의 인물들을 다루는 능력을 그대로 대사에 녹여냈는가 하면 자신의 과욕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성격 또한 직간접적으로 화면에 담아냈다. 로비스트인 데보라심 역을 맡은 배우 김소진의 발견 또한 영화를 보는 재미가 됐다. 제 색깔을 찾아 연기를 펼치는 모습이 대사와 연기에 그대로 채색되는 게 눈에 띄었다.



영화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드라마 <제5공화국>의 도입부와 지극히 비교되는 씬이 많다. 그런 점에서 김재규 역을 맡아 열연했던 배우 김형일과 분명 비교된다. 배우 김형일이 당시의 상황을 재해석해 그때의 긴장감과 긴박감을 그대로 살려낸 것에 비해 이 작품에서의 배우 이병헌은 지극히 차분하고 철저한 준비성을 갖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거사를 치를 때는 너무나 즉흥적이고 실수가 잦다. 당시의 감정선을 쉽게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현장에서의 긴박감까지 담아내기엔 무리였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감독의 메시지가 강하게 드러난 자동차의 유턴 씬이다. 분명 철저한 준비와 함께 거사를 치러냈지만 그 침착성과 준비성에 비해 감정의 흐름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채 남산을 향하던 자동차는 너무나 쉽게 유턴을 하고 육군본부로 향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우민호 감독의 메시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강하게 담고 있다. 그건 당시 40일간의 상황을 단순히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김규평이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나름의 정당성에 보다 힘을 실어주는 방향이 됐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인물인 김재규의 항변을 틀어주는 모습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행위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더욱 그렇다. 그 자체만으로 감독의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있음이 바로 마지막 씬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갈라놓았던 바로 그 상황, 남산으로 향하던 자동차가 갑자기 육군본부로 유턴하는 그 장면은 카메라 앵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 꽂는다. 그 도로에서의 멈칫거림이 그때의 그 선택의 주저함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어 개인적으로 이 영화 통틀어 가장 훌륭한 씬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감정의 기복과 표현이 표정 속에 크게 드러나지 않음이 아쉬운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영화는 가려진 진실과 거짓의 한 가운데에 놓여있는 살아있는 역사를 다뤘다. 기존의 전작들과 비교해 크게 개성을 드러내지 못함은 더없이 아쉽지만 배우들의 연기력과 탄탄한 시나리오가 이 작품의 뒤를 든든히 뒷받침해 줬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과거를 간직하고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를 가진다. 이 영화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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