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나비목과에 속하는 ‘나방’이라는 곤충이 있다. 딱히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는 않지만 야행성에 물이나 쓰레기 등에 주로 모이다 보니 인간들에게 환대받는 존재는 아니다. 나방은 불어로 ‘papillon nocturne’이라고 하는데 굳이 해석하자면 ‘밤나비’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나비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차이점을 찾자면 뭐라 해도 일정 온도나 습도 등이 갖춰지면 불빛에 반응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주로 나무 틈이나 바위 밑, 습기가 있는 곳에 은신하다가 밤이 되면 불빛을 보고 날아들게 되는데 이때 불빛에 목숨을 걸고 뛰어드는 습성을 보고는 ‘당연한 실패 혹은 위험을 알면서도 무모하게 일을 추진시키거나 실행하는 모습’을 흔히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과 같다고 부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 당연히 이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당기게 되는 어느 연약한 몸짓의 처절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한 단어가 떠오른다. 흔히 ‘어쩔 수 없었다.’라고 얘기하는 그 ‘어쩔 수’. 이 ‘어쩔 수’는 말 그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이다.
그 방향이 좋지 않게 흘러갈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음을 나름 자신의 이유에 맞춰 정당화시키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상황을 나 스스로 이해하는 것도 힘든데 타인을 설득시키려면 보다 많은 노력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다. 롭 마샬 감독의 2002년 작, 영화 <시카고>가 그렇다. 록시 하트(르네 젤위거 분)가 저지른 살인은 우발적이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녀가 사랑했던 무대는 화려함에 이끌려 춤을 추게 만드는 불빛과도 같았다. 당연히 그녀는 그 불빛에 이끌려 자신의 날개가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는 한 마리의 나방에 해당되고 말이다. 그녀는 남편인 아모스(존 C. 라일리 분) 몰래 불륜을 저지른다. 불륜은 밤의 화려한 무대를 흔들어줄 자신만을 위한 재즈 무대에 대한 대가였다. 그 약속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리자 그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구렁텅이로 스스로 몸을 던진다. 그날 그녀가 잡아당긴 방아쇠는 불빛을 유혹하는 그녀의 처절한 춤사위와도 같았다. 그렇게 그날의 화려함은 순간에 묻혀 빠져 들어만 갔다. 그녀의 아름다운 날개마저 아스라이 태워버린 채 말이다.
영화 <시카고>는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화려한 무대를 스크린 속에 고스란히 집어넣기 위해 곳곳에 관객들이 눈여겨봐야 할 주안점을 만들어 두었는데, 가장 중요한 점이 ‘캐릭터’의 색깔이다. 무대의 주인공인 록시 하트는 전혀 화려함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불빛을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 나방처럼 쿡 카운티 교도소에서 외로움과 침묵 속에 흐느껴 울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의 처지를 달래주는 게 바로 교도소의 여섯 여성 살인수들이 만들어내는 독방 탱고, ‘Cell Block Tango’다. ‘Pop, Six, Squish, Uh-Uh, Cicero, Lipchitz’로 대변되는 이 탱고의 가사에서 가장 눈여겨 보이는 줄은 다름 아닌 ‘He had it coming’이다. ‘죽어도 싸지’, 다시 말해 잇따라 흘러나오는 ‘It was a murder, But not a crime’처럼 살인은 맞지만 내가 한 행동은 범죄는 아니란 거다. 이 무대는 영화 속에서 록시 하트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때부터 록시 하트의 색깔이 새롭게 채색된다. 그녀는 절대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지 않는다. 나는 당당하게 살인을 했고 내가 행한 살인은 범죄가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는 거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교도소장 마마(퀸 라티파 분)와의 거래로 승률 100% 변호사인 빌리(리차드 기어 분)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자신을 불 속에서 끄집어내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의 이런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불 속으로 더욱 밀어 넣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남편과 동생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고 화를 못 이겨 살인을 저지른 벨마(캐서린 제타 존스 분)의 색깔이 정열의 ‘빨강색’이라면, 록시의 색깔은 속을 알 수 없는 ‘검정색’이라고 해도 좋다. 벨마는 무대에 대한 미련과 자신이 달려드는 불빛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행동했지만, 록시는 그렇지 않았다. 목숨에 대한 처절함보다 무대를 바라보는 미련이 더 크게 작용했듯이 그녀는 불길 속으로 그렇게 몸을 쉽게 내던졌다. 남편인 아모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도 남겨두지 않은 채 말이다. 빌리가 돈과 유명세에 집착하는 ‘파랑색’을 가졌다면 아모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만큼의 ‘하얀색’과도 같다. 이처럼 이 영화는 화려한 뮤지컬 무대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 답게 캐릭터의 색깔을 분명히 해 관객들에게 그 생생함을 그대로 전달하려 노력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카고’라는 무대는 냉정하지만 화려하고 불꽃같지만 쉽게 사그라질 줄 아는 불구덩이와도 닮았다. 그런 세계가 바로 ‘시카고’다. 잠깐 눈독 들이는 반짝 스타에 열광하다가도 내일이면 그저 그런 눈요기로 전락하고 마는 쉬운 불구덩이 말이다. 빌리가 록시를 안심시켜주기 위해 던지는 재판을 묘사하는 대사는 그런 비유가 덧대어 있다. “이건 쇼야. 서커스란 말이야.” 그들에게는 이 모든 게 스타와 함께 하는 서커스에 불과했다. 누구에게는 목숨이 걸려있는 위험천만하고 아찔한 무게로 느껴지겠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재판을 즐길 줄 안다. 여기에 명배우 리차드 기어가 선보이는 탭댄스 장면은 가히 일품이다. 이 탭댄스의 경쾌한 소리는 관객들에게 자칫 무거운 요소로 받아들여질 ‘재판’을 한 순간에 즐거운 ‘무대’로 만들어 버린다. 모든 시카고 시민들이 라디오를 들으며 세기의 평결을 기다리는 장면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다. 신문은 그녀를 두고 ‘유죄’와 ‘무죄’ 두 가지 결과에 대한 장들을 동시에 준비해 둔 채 재판의 결과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 외쳐지는 목소리는 관객들로 하여금 탄식을 나오게 만든다. 거짓 임신에 착하고 순한 남편마저 외면한 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주인공 록시를 두고 이 결과를 누구도 반길 수는 없지만, 그 누구도 그녀에게 돌을 던지기도 힘들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록시는 그런 색깔을 풍기며 관객들에게 여전히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은 맞지만 범죄는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다.
영화 <시카고>는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화려한 무대와 음악뿐만 아니라 그 스토리 측면에서도 충분히 제대로 된 조명을 받을만한 작품이다. 캐릭터의 색깔을 분명히 하고 관객들이 무대를 즐길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유죄’냐 ‘무죄’냐의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색채의 캐릭터와 음악, 춤 등으로 승화시켜 해학적으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그 연출적 묘미가 뛰어난 영화이기 때문이다. 롭 마샬 감독은 영화 <애니>(1999)는 물론, 이 작품 <시카고>를 통해 <나인>(2009), <숲속으로>(2014), <메리 포핀스 리턴즈>(2018)를 거치며 이 방면에 탁월한 연출력을 선보여 왔다. 거기에 르네 젤위거, 캐서린 제타 존스, 리차드 기어, 존 C. 라일리 등 개성 강한 캐릭터들로 화면을 채워 넣은 점은 여러 요소들이 한데 모여 풍성한 볼거리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관객들이 즐길만한 거리가 충분하다. 무겁지만 가볍고 부드럽지만 강렬한 색깔을 스크린 속에서 느끼고 싶을 때 이 영화 <시카고>가 늘 떠오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