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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Jun 28. 2021

실습의 추억 - 외국에서 연예인 되기



학교 배가 정박한 동안은 사실 지루했다. 배라는 새로운 공간에서 생활한다는 신기함도 잠시, 생활은 육지 기숙사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안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불편함은 주로 좁은 데서 비롯됐다. 소현은 2층 침대가 두 개 있는 3인 1실을 사용했는데, 한 명이 옷을 갈아입거나 방 한가운데서 뭘 하고 있으면 나머지 두 명은 자리가 없어서 침대에서 대기 타며 기다려야 하는 정도였다. 혼자만의 공간이나 시간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방뿐 아니라 배가 전체적으로 협소해서 어딜 가나 동기들이 바글바글했다. 복도에서 양쪽으로 만나면 어깨가 부딪히지 않도록 게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소현은 사관부 활동을 겸하느라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좁은 배 안에서 100여 명의 동기들과 매일 복닥대며 공부하고 실습하고 과외 활동까지 정말 숨 돌릴 틈 없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으면 있을 원양 항해를 기대하며 버텼다. 학교 배는 실습 차원으로 연안 항해와 원양 항해를 나간다. 연안 항해는 국내의 다른 항구까지 항해하는 것이고 원양 항해는 외국항에 기항해서 놀다 오는 것이다. 원양 항해는 학창 시절 수학여행 개념으로 보면 된다. 100명이 넘는 동기들과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정말 흔치 않아서 모두 손꼽아 이 날을 기다렸다.     



원양 항해를 떠나는 날, 가족과 선배, 후배들이 모두 학교 항구에 모여 안전 항해를 기원해주는 행사가 열렸다. 소현과 동기들은 깔끔하게 제복을 갖춰 입고 배 위에 일렬로 섰다. 각자 손에는 긴 리본을 말아 쥐고 있었다. 교수님의 신호가 떨어지자 학생들은 일제히 리본을 아래쪽으로 던졌다. 미리 설명을 듣고 기다리던 사람들이 저마다 리본을 잡아주었다. 소현의 리본은 친한 후배가 잡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위로 수많은 리본이 흩날렸다.     



와----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았다. 소현은 설렘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한나라호가 원양 항해의 닻을 올렸다!     



이틀 뒤 소현이 탄 한나라호는 중국 청도에 도착했다. 가까운 나라는 비행기 타면 2시간도 안 걸리는 요즘 세상에 배를 타고 느릿느릿 가는 기분은 색달랐다. 워낙 알려지지 않은 전문기술을 배우는 분야인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남들은 하지 못하는 경험을 참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습의 일환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내려서 관광하고 밤에는 다시 배로 돌아와야 했다. 숙박비와 비행기 값이 전혀 들지 않는 해외여행인 셈이었다. 교수님은 마음껏 즐기고 오라는 ‘특명’을 내렸다. 소현은 친구들과 함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녔다. 개인적으로 회사 실습 때 잠깐 내렸던 호주를 제외하고 외국은 처음이었다. 소현은 정말 원 없이 놀았다. 맛있어 보이는 것, 먹고 싶었던 것, 신기해 보이는 것은 다 먹어봤고, 유명한 관광지는 빼놓지 않고 들어갔다.     



그동안의 힘들었던 해양대 생활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완전히 자유였다. 단 한 가지 규정만 지키면 됐다. 해외 상륙 시 반드시 제복을 입어야 했다. 단체로 제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은 어디서나 시선을 끈다. 하물며 각 잡힌 군대식 제복과 모자까지 똑같이 맞춰 쓴 20대 초반 여대생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항구에서 벗어나자마자 현지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집중됐다. 하나같이 신기해하는 표정이었다. 찰칵찰칵 플래시 세례를 받기도 했다.     



들른 도시마다 현지인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다양한 질문을 받았고 졸졸 따라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같이 사진 찍어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다. 연예인이 된 기분이었다. 날아갈 것 같았다. 팬 서비스하듯 말이 안 통하는데도 손짓 발짓해가면서 그들의 요구에 최대한 응해줬다.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배로 돌아오면 친구들끼리 그날 찍은 사진을 돌려가면서 보고 재미있었던 에피소드들을 나누면서 밤새워 깔깔거렸다.    


 



원양 항해의 마지막 도시인 오사카에서는 유명한 덴포진 대관람차를 탔다. 마침 오사카항 바로 앞에 있어서 귀선하기 직전 마지막 운행 시간에 맞춰 탑승했다. 일본인들이 일생에 한 번은 꼭 본다는 관람차에서 내려다보는 오사카의 야경을 꼭 보고 싶었다. 관람차는 전체가 투명해서 사방을 감상할 수 있었다. 소현은 멋진 오사카 야경을 넋을 잃고 보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오사카항에 정박한 한나라호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얘들아, 저기 우리 배 있어!”     



밖에서 보는 한나라호는 꼭 빛의 도시처럼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오사카의 야경도 아름다웠지만 우리 배는 환상적이었다. 관람차에서 내려 기념사진을 찍는데 이곳에서도 일본인들이 와서 같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소현은 그들의 요청대로 관람차를 배경으로 한 장, 한나라호를 배경으로 또 한 장을 찍어주었다. 소현의 청춘이 한나라호의 불빛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중국 청도, 일본 히로시마, 오사카 등 약 3주에 걸친 원양 항해를 마친 한나라호는 다시 부산으로 출발했다. 해양대 졸업생들은 대학 생활 중 가장 즐거웠던 기억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 원양 항해를 꼽는다. 긴 해양대 생활을 놓고 보면 꿀처럼 달콤한 시간은 아주 잠깐이다. 그러나 찰나라서 더 찬란했던 이 기억 덕분에 소현은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배를 탈 생각까지 할 수 있었다. 소중한 추억은 험난한 인생길에서 그만큼의 힘을 발휘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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