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창가 Jul 01. 2021

내 이름은 '전교 1등'이었다



“배 타고 나가면 기분이 어때?”

“기관부에서 어떤 일들 하는 거야?”

“태풍이 오면 어떻게 해?”

“타이타닉 뭐 이런 느낌이야?”

“돈 진짜 많이 받는다! 어떻게 그렇게 좋은 직장에 취직한 거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배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 친구들의 관심은 거의 폭발 수준이었다. 워낙 특이한 직업이라서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신기함의 대상이 됐다. 소현을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하나하나 답하며 소현은 속으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고교 동창인 친구들은 대부분 의대 계열 혹은 누구나 선망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한때 꿈이었던 의사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상실감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대학 합격 후 한동안은 소위 말하는 SKY를 가지 못한 창피함에 동창들과 연락을 끊고 지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다시 만난 친구들은 오히려 파격적인 소현의 진학 행보에 관심과 궁금함을 표했다.     




소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상산고 시절이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보면 병풍 같은 친구들이 있다. 잘 나가는 친구들의 뒤를 배경처럼 깔아주는 존재. 그림자 같기도 한 그 아이들은 존재감이 미약해서 졸업하고 난 뒤 돌아보면 무책색처럼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소현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항상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기에 허탈감은 더욱 컸다. 늘 노력만큼 나오지 않는 성적에 절망했고 그렇게 조용히 학창 시절을 마감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소현’이라는 이름보다 ‘전교 1등’이라고 불린 순간이 더 많았다. 당연히 자존감이 하늘을 찔렀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진학 후 단숨에 전교 꼴찌권으로 떨어졌다. 정상에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던 사람보다 한 번이라도 올라가 봤다가 떨어진 사람이 더 못 견디는 법이다. 할리우드 톱스타들이 전성기를 지난 뒤 무너진 자존감을 이겨내지 못해 마약 중독에 빠지는 기사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소현 역시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비운의 톱스타였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았다.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고 절망했을 땐 겨우 스물, 인생이 꽃 피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비록 의대에 진학해 의사라는 성공한 인생을 살겠다던 꿈은 사라졌지만 자포자기하기에 세상은 너무 넓었다. 세상에는 의사 아니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부모님도, 친구들도 아닌 무엇보다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힘들었던 해양대 4년을 버티는 원동력이 됐다. 소현은 엄마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동창회에 벤츠 타고 나가겠다’고 호언장담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 노력과 의지는 배신하지 않고 두 배, 세 배의 기쁨으로 응답해 주었다.     




“귀하는 2020년도 정기신채사관 입사전형에 최종 합격하셨으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소현은 졸업과 동시에 SK 해운에 정식으로 합격했다. 한국 해양대에서 여성 3등 기관사는 딱 한 명 채용되는데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소현의 취업은 꽤 의미 있는 결과였다. 청춘들이 취업난에 허덕이는 어려운 시기, 한창 다른 친구들은 공부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소현은 당당하게 고소득 전문직 여성의 길에 일찌감치 발을 들여놓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 워너비들의 워너비가 되면서 소현은 밑바닥으로 내려가 있던 자존감이 힘차게 달려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감춰져 있었던 ‘전교 1등’의 당당함이 마침내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실습의 추억 - 외국에서 연예인 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