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창가 Jul 03. 2021

고소공포증 엄마가 아들을 사랑하는 법



나이가 든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새치가 늘어나는 것도 슬프고 , 10시를 못 넘기고 자꾸 눈이 감기는 것도 슬프다. 슬플 뿐 아니라 불편한 것도 많다. 그중 하나가 멀미다. 나는 '키미테'가 뭔지 모르고 자랐었다. 멀미는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없던 멀미가 시작됐다. 이제는 유난히 좁은 차 안이나 공기가 답답한 곳에선 어김없이 어지러우면서 구토가 나기 시작한다. 멀미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삶의 반경은 좁아졌다.



주말마다 야외로 놀러 나가는 우리 생활 패턴에 나의 멀미가 복병으로 등장하면서부터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의 거리를 계산하게 됐다. 조금만 길어지거나, 아니면 가까워도 차가 막히는 곳이면 꺼리게 됐다. 여지없이 어지럼증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작년부터는 동네 놀이터 그네도 함부로 못 탄다. 그네가 왔다 갔다 두 번만 흔들리면 어지럽기 시작해서 얼른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땐 내가 안고 30분도 넘게 흔들흔들해줬었는데. 놀이터 뱅뱅이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아이가 타면서 "엄마! 나 좀 봐!"하고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도 2초 이상 못 쳐다본다. 보기만 해도 어지럽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나의 멀미가 육아에 걸림돌이 됐다. 아이가 놀이기구 마니아였던 것이다. 조용한 아이의 내면에 그런 익스트림 스포츠 성향이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든 장단을 맞춰주고 싶었지만 내 멀미가 도와주지 않았다. 멀미는 높은 곳에 올라갈수록 심해지는데, 놀이기구란 것은 대개 높은 곳에서 끊임없이 빙빙 돌아가기 마련이다.



놀이기구를 너무 좋아하는 아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놀이공원에 간 것이 화근이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구들을 보자 아이는 토끼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이것도 타자 저것도 타자 엄마 아빠 손을 번갈아 잡아끌었다. 남편은 학창 시절부터 케이블카도 못 타는 고소공포증 중증 환자다. 우리 부부는 웬만하면 땅에서 직진으로 가는 걸 찾아보려고 했으나 놀이공원에서 그런 놀이기구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풍선 세 번, 댄싱 문어 두 번을 타고나니 걷잡을 수 없이 오바이트가 쏠렸다. 말 못 하던 아기 때처럼 또! 또! 를 외치는 아이 앞에서 남편과 나는 서로 눈짓을 하며 슬슬 차례를 미뤘다.



그러다가 아이가 마침내 그것을 보고야 말았다. 넘나 무서운 바이킹!!



대학 때 멋모르고 탔다가 바지에 지릴 뻔한 이후로 근처에 가지도 않았던 그 무서운 놀이기구에 아이가 꽂힌 것이었다. 입을 헤 벌리고 한참을 쳐다볼 때만 해도 아직 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요 어린 녀석이 그걸 덥석 타자고 조를 줄은 몰랐다. 대놓고 그 앞을 활보하고 다니다가 딱 걸린 것이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무서운 항해를 마치고 바이킹이 멈추자 아이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엄마! 나 저거 탈래!



남편은 손사래까지 치면서 아예 벤치에 앉아버렸다. 자기는 그걸 탔다가는 바로 구급차에 실려 갈 거란다. 그건 사실이었다. 남편은 나와 연애할 때도 공중으로 올라가는 건 한 번도 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멀미가 심해서 타는 게 두려웠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어떻게 된 게 그렇게 무서운 바이킹에 나이 제한이 없었다. 키 제한만 있었다. 아무리 말해도 아빠 엄마가 요지부동이자 아이의 얼굴이 애처롭게 변했다.



영화 <슈렉>



아이의 커다란 두 눈은 영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애처롭게 빛나며 내게 함께 바이킹에 타 줄 것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눈을 본 나는 도저히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타자. (설마 죽기야 하겠어)



호기롭게 바이킹에 올라탄 내 두 손은 눈에 띄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왠지 낡아 보이는 안전바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아서 수십 번을 들어 보았다. 뉴스에서 봤던 놀이공원 안전사고 사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맞은편 선미 끄트머리에 앉은, 내 아이보다 어려 보이는 꼬마를 보자 용기가 솟았다. 그래, 할 수 있어!



출발 신호와 함께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다섯 번 정도 흔들릴 땐 견딜만했다. 하지만 위잉-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커지면서 진동의 폭이 커지자 나는 결국 눈을 꼭 감아버렸다. 도저히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을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다. 안전바가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면서 곧 죽을 거라는 공포가 밀려왔다. 아이는 옆에서 끼야아악!! 소리를 지르며 혼자 신이 났다. 주변에 앉은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안전바를 부서져라 꼭 잡은 채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2분이 2년 같았다. 너무 끝나지 않자 나중에는 욕이 나오려고 했다. 영원과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흔들림의 각도가 줄어들면서 마침내 왜 만든 지 모르겠는 이 놀이기구가 운행을 멈췄다. 꽉 감은 눈꼬리에선 눈물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간신히 눈을 뜨자 아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꼬마는 얼굴에 눈물 콧물이 뒤범벅됐고 아이 아빠는 달래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는 생각보다 무서웠지만 너무 재미있었다면서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나는 바이킹에서 땅까지 여섯 개밖에 되지 않는 계단에서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결국 나는 벤치에 쓰러져 버렸다. 땅이 자꾸만 위로 올라와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남편은 탄산음료와 얼음을 사 와서 마시라고 건네고 머리에 대 주었다. 아무리 해도 빙빙 도는 머리와 속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는 아빠와 둘이 최대한 덜 빙빙 도는 기구를 타면서 엄마가 일어나길 기다렸지만 나는 끝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몸을 가누지 못했고, 그 이후 2주 동안 집에서도 앉았다 일어나면 어지러워서 다시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사실 그 상태가 열흘 정도 지나자 영원히 어지러운 채로 살아야 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다행히 3주째가 되자 컨디션이 올라오면서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놀이공원 가자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할 것 같다. 이미 고기 맛을 봐버린 아이에게 풀만 뜯어먹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이킹이라는 스테이크를 덥석 먹은 아이는 이제 그 옆의 풀떼기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바이킹은 언제 또 타러 가냐고 자꾸 묻는다. 그날 차에서 쓰러진 상태로 나는 영원히 바이킹을 타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바이킹 타러 가자고 조르자 고민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면 아이가 또 간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면 죽을 것 같았던 기억을 잊고 다시 탈지도 모르겠다.



난 엄마니까.



작가의 이전글 내 이름은 '전교 1등'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