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구직 활동을 시작하면서 소현은 고민을 했다. 보통 사람들은 어느 회사에 취직할까를 고민하지만 소현은 특이하게 육지에 남을지 바다로 나갈지를 저울질했다. 해양대 해사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바다로 나가는 건 아니다. 얼마든지 지상직으로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소현은 최종적으로 바다로 나가는 걸 선택했다. 거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처음부터 배를 타겠다고 결심하고 대학 생활을 한 건 아니었다. 대학에서 배운 전문 지식을 실제로 써먹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는 있었지만 ‘설마 내가 바다로?’라는 생각이 더 컸다. 그러다가 3학년 때 회사 실습을 다녀오면서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직접 배를 타자 수업 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달달 외운 것들이 생명력을 갖추고 살아나기 시작했다. 책 속에만 존재하던 이론들이 살아 나와 기기를 고치는 데 쓰인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예를 들어, 전공 서적에 ‘부하가 많이 걸리면 Amp(암페어, 즉 전류치)가 올라간다’는 문장이 있었다. 소현은 부하가 뭔지, 암페어가 뭔지도 모른 채 문장을 통째로 외워서 시험지에 적어 넣었었다. 그런데 배에 타서 보니 기계에 문제가 있으면 정말로 암페어 지시값이 평소보다 올라갔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지표였다. 그런 것들이 눈앞에서 생생하게 벌어진다는 게 짜릿했다.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이 현장의 힘을 강조할 때 자주 쓰는 말이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현장만의 노하우와 분위기를 알아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인데 배를 타 보니 그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싶었다. 소현은 책상머리에 앉아서는 절대 알 수 없는 현장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 성격이 한몫했다. 원래 책상에 가만히 앉아서 컴퓨터만 들여다보는 것보다 몸을 움직여 직접 부딪혀 보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여기에 운도 따라주었다. 실습 때 폭언, 폭력 등의 부당한 대우를 받아서 죽어도 배는 못 타겠다는 동기들이 종종 있었다. 소현은 다행히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정말 실습이란 걸 제대로 해봤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려는 선배들 밑에서 많은 걸 배우는 행운을 누렸던 덕분에 선박 기관사를 직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몰랐던 성향도 발견했다. 소현은 자신이 외로움을 별로 타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사실 이게 직업을 결정하는 데 뭐 그리 큰 영향을 미칠까 싶겠지만 바다에 나가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금방 알게 된다. 바다 위에서 일한다는 건 매일 푸르른 바다와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휴가라도 온 듯 설렁설렁 일하는 게 아니다. 익숙했던 모든 것들과 결별한 채 바다 위에서 ‘갇혀’ 지내며 외로움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런데 소현은 가족과 친구들과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내도 별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이건 절대 노력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배 탄 경력이 꽤 되는 선배들은 소현을 천생 뱃사람이라고 인정했다.
어린 나이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힘겹게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소현은 돈의 중요성을 남들보다 일찍 깨우쳤다. 돈 때문에 쪼들리며 하고 싶은 거 못하고 살고 싶지는 않았다. 배를 타면 지상직보다 월급이 훨씬 세기 때문에 기왕 일한다면 그쪽으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험한 바다로 나가겠다는 결정을 알렸을 때 부모님은 걱정을 많이 하셨다. 소현의 대학 4년 생활과 실습 과정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보았기에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길인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미조차 평범한 걸 거부하는 딸의 성향과 뭐든지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해보자는 의지 또한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걱정을 뒤로 한 채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셨다. 친구들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직업이라면서 무척 신기해했다.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MZ세대로 대표되는 90년대생들 역시 안정적이고 근무 환경이 좋은 공무원 시험에 매달린다. 해기사 3급 면허를 소지하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공무원직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소현의 동기들 역시 너도나도 공무원 쪽으로 몰려들었다.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기상청, 문화재청, 교육청, 국방부, 해군, 공군 등등으로 매년 해양대 졸업생들은 구애의 손길을 내민다. 승선 생활을 해야 하는 선박 기관사는 같은 공부를 한 남자 동기들도 선뜻 나서지 못할 만큼 극한 직업이다. 그래서 특히 여자는 지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현은 오히려 그 희소성을 즐기고 싶었다. 남들 다 하는 건 재미가 없었다. 똑같은 면허를 갖고 똑같이 공부해서 1년 365일 바다가 보이지 않는 책상에 앉아 사무를 보는 일은 원치 않았다.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