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여름이다. 엄밀히 따지면 6월부터 여름이지만 기분은 방학과 휴가가 있는 7월부터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한다. 여름은 쉼과 삶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계절이다. 대한민국 직장인 대부분이 1년에 한 번 제대로 가는 휴가를 떠나고, 아이들은 매일의 등교 혹은 줌 수업의 의무에서 벗어나 조금 숨 쉴 틈을 갖는다. (물론, 온갖 학원들이 방학 특강을 시작한다. 불쌍한 아이들!)
여름은 이렇게 일면 휴식과 동일시되지만 동네에서 조금만 나가보면 사방을 둘러싼 초록빛이 쉬지 말라고 다그치는 신기한 계절이기도 하다. 여름에 생명력이 넘쳐흐른다. 땅을 뚫고 올라와 무성하게 이파리를 피운 나무, 풀, 꽃, 그리고 (싫지만) 벌레들. 집에 가만히 있지 말고 들로 산으로 나가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요즘 우리는 텃밭으로 향했다. 감자와 옥수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시는 시부모님 덕분에 아이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흙과 친해졌다. 평생 거의 대부분을 농사짓고 사신 아버님의 '농부 DNA'를 물려받았는지 아이는 배우지도 않은 농사일을 제법 한다. 주말마다 할아버지 텃밭에서 땅을 파고 놀더니 이미 네 살 무렵부터 삽질, 씨 뿌리기, 모종 심기, 채소 뽑기, 물 주기 등은 엄마 수준을 뛰어넘었다. 아버님은 늘 손자에게 채소 한두 가지를 직접 심고 가꾸어 수확할 기회를 주셨고, 아이는 할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농사의 사이클을 작물별로 보고 배웠다. 텃밭에는 아이 전용 삽, 호미, 갈퀴, 목장갑, 장화, 햇빛 가리개가 당당하게 할아버지 물건들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일도 잘하지만 특히 내가 신기한 부분은 텃밭 작물을 향한 아이의 애정 어린 눈빛이다. 자기가 심은 작물을 매주 가서 관찰하면서 얼마나 자랐는지, 물은 부족하지 않은지, 비닐하우스에서 밖으로 옮겨 심기 좋은 때는 언제쯤인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궁금한 점을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비라도 내릴라치면 "내가 심은 옥수수 쑥쑥 자라겠네!"라면서 좋아하고, 조그만 씨앗이었던 옥수수가 자기 키보다 커다랗게 자라 열매를 맺을 때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다. 이건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라서 봐도 봐도 신기하다.
7월 첫 주말 아이는 감자를 캐고 옥수수를 땄다. 아버님이 아이가 태어난 이후 올해 처음으로 감자를 심었기 때문에 감자 캐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는 날렵한 호미질과 옥수수 껍질 벗기기 신공으로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제는 아이 없는 텃밭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이가 든든한 한 사람 농부의 몫을 하게 됐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옛것이 소중해지고 근본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어쩌면 아이가 어른이 됐을 땐 자연과 흙을 잘 아는 농부가 모두의 '구루'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아이는 주말마다 꼬마 농부로 변신하면서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값진 지혜를 몸과 머리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