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라면 누구나 아이가 하는 말에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다. 어록으로 묶어 따로 정리했다가 나중에 꺼내 보고 싶을 만큼 기발한 이야기를 할 때도 있고, 어른도 울고 갈 만큼 예리한 시각을 보여줄 때도 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면서 '허걱!' 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아이가 전지현과 공효진에 대해서 말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때는 아이가 다섯 살 무렵. 다섯 살짜리가 뜬금없이 무슨 전지현과 공효진이냐 하겠지만 물론 아이는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냥 우연히 보고 자기 의견을 얘기했을 뿐이었다. 그걸 듣고 의미 부여하고 놀라는 건 엄마의 몫.
나는 아이와 신문지와 광고 전단지를 이용한 놀이를 즐긴다. 따로 워크북이나 프린트물을 준비하지 않아도 재미난 그림과 글씨가 많아서 인지 발달에 좋고 글씨 익히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그날도 현관문에 붙어 있던 광고 전단지를 뜯어서 갖고 들어왔다. 마침 전지현의 치킨 광고였다. 나는 치킨을 자르고 붙이는 놀이를 하려고 아이에게 그 종이를 건네며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이 이모 치킨 진짜 맛있게 먹는다."
유심히 전단지를 들여다보던 아이가 대답했다.
"이모 아니야. 누나야."
칼 같이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하던 걸 멈추고 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치킨을 말했는데 아이의 두 눈은 전지현에게 고정돼 있었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묻고 싶어 졌다.
"이 이모 누나 아니야. 엄마랑 나이 비슷해. 엄마 친구면 이모지."
그랬더니 아이가 정말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진심으로 황당해하는 말간 두 눈에 오히려 내가 할 말을 잃었다. 아이는 나를 뚫어져라 보더니 다시 전지현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결론을 내렸다.
"누나야."
그래, 알았다, 알았어. 지도 눈 달렸다고 이쁜 여자는 알아보나 보다. 이게 뭐라고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인정할 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아이와 산책을 나갔다가 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 마침 쓱 배송 트럭이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있었다. 샛노란 쓱 트럭은 색깔 때문인지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아이가 얼른 트럭 쪽으로 다가갔다. 열린 뒷문에는 쓱 모델인 공효진 사진이 커다랗게 인쇄돼 있었다. 나는 아까 전지현 생각이 나서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누나가 배달해 주는 건가 보다."
한사코 전지현이 누나라고 강조한 걸 보니 저 정도 외모의 여성은 아이 눈에 다 누나로 보이는 줄 알고 나름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아까보다 더 단호한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누나 아니야. 이모야."
갑자기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쓸데없이 따지고 들었다.
"아까는 누나라고 했잖아. 왜 지금은 이모래?"
"그 누나는 누나고 이 이모는 이모야."
마치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하는데 왜 홍시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냐는 듯한 말투였다. 순간 아이 말의 속뜻이 마음대로 해석되어 내 귀에 꽂혔다.
누나야 -> 섹시해
이모야 -> 청순해
그러고 보니 전지현과 공효진은 나이가 비슷한데 맡은 역할은 참 달랐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공효진은 러블리한 이미지의 아가씨임에도 유독 미혼모, 아이 엄마 역할을 자주 맡았다. 반면 전지현은 현실에서 아이 엄마가 된 후에도 여전히 아이와는 하등의 상관없는, 멋진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로맨스의 여주인공만 했다. 아이는 거짓말을 못 한다는 말이 이런 뜻인가 싶었다. 사람 잘 본다는 PD 눈에도 전지현은 '누나'로 보이고 공효진은 '이모'로 보였으니 저렇게 역할 분배가 된 거 아니겠는가.
나는 다섯 살짜리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괜히 미래의 아들 여자친구를 상상해 보았다. 아들아, 너의 여자 보는 눈이 탁월한 것 같구나. 나중에 꼭 전지현과 공효진을 닮은 섹시하고 청순한 여자를 만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