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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창가 Apr 17. 2021

꽃게 사러 갔다가 살벌한 여자를 만났다



봄은 꽃게철이다. 그 말인즉슨 나의 계절이다. 1년에 딱 한 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인 간장게장을 담그는 시기다. 봄 암케는 알이 꽉꽉 들어차서 간장게장 담그기 안성맞춤이다. 보통 해물은 가까운 곳에서 사는 편이지만 꽃게철엔 보다 싱싱한 꽃게를 구입하려고 소래포구를 찾는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달력이 4월로 넘어가면 내 눈 앞엔 벌써 꽃게가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다이어리를 꺼내 소래포구를 방문할 날짜를 정한다. 그날은 비가 쏟아져도,  차가 막혀도 무조건 간다. 달콤한 열매를 위해 그 정도 수고쯤이야 하는 것이다.


그 해 4월에도 꽃게를 사러 소래포구에 갔었다. 우리는 어머니와 어린아이까지 태우고 총출동했다. 날씨 좋은 주말 소래포구는 몰려든 사람과 차로 발 디딜 틈 없었다. 간신히 주차하고 내린 나는 유모차부터 펼치고 아이를 앉혔다. 강한 비린내가 코를 푹 찔렀다.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보니까 아이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역한 생선 냄새와 군침 넘어가는 간장게장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지만 곧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제철답게 꽃게 천지였다. 장관이었다. 소래포구 전체가 꽃게로 가득 찬 것 같았다. 김장 다라이보다 더 큰 다라이가 빼곡하게 들어선 복도는 한 줄로 서서 걸어도 좁았다. 그 길을 유모차를 밀고 가려니 힘들었다. 맨 앞에 남편이 서고 그 뒤로 어머니, 맨 뒤엔 내가 유모차를 밀고 걸어갔다.


바로 앞에서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시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억척스럽게 소리를 질러대는 장사꾼들 때문이었다. "꽃게 사세요!" "여기 싸게 드려요!" "언니, 꽃게 안 필요해요!" "오늘 새벽에 들어왔어요!" 입마다 투명 확성기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어찌나 폐활량들이 좋은지 쉬지도 않았다. 저마다 먹고살겠다는 절박한 의지가 음성에 그대로 실려 나왔다.


남편은 이 상태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겠다 판단하고는 그냥 옆 가게에서 사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 엉거주춤 선 채 오가는 사람들에 이리저리 밀리며 흥정을 했다. 그런데 좁은 복도 때문에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소래포구 가게 자리 하나는 우리 넷이 늘어선 길이보다 작았다. 아이가 탄 유모차가 부득이하게 옆 가게 앞을 살짝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좀 치워요!"


갑자기 유모차가 확 밀렸다. 놀란 아이는 왕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옆집 사장이 손님으로서의 가치가 없어진 우리를 짐짝처럼 밀어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유모차 바퀴가 다라이에 턱 걸렸다. 다라이가 반쯤 기울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안에 담긴 물이 크게 출렁였다. 바로 앞에 딱 붙어있던 아이와 나는 물세례를 받았다. 바닷물의 짠맛과 날생선 맛이 동시에 입 안으로 들어왔다. 옷이 흠뻑 젖은 아이가 발버둥 치면서 거의 자지러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내 입에서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큰 고함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여자는 지지 않고 삿대질을 해대며 오히려 화를 냈다. 유모차가 막아서 손님을 여럿 놓쳤다는 것이다. 바닥에는 다라이에서 쏟아진 꽃게 몇 마리가 발발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자주 있는지 상인들은 자기 장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아!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한쪽 집게발만 유독 큰 꽃게 한 마리가 늘어뜨린 내 손가락을 꽉 물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당장 떼어내려 하자 남은 한 집게발이 이번엔 내 반대쪽 손가락을 향해 돌진했다. 무서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나는 꽃게에 손가락이 잡힌 채 아파서 동동거렸다. 아이는 울고, 어머니는 흥정하느라 정신없고, 남편은 차 빼주러 갔고, 이 사건의 발단인 꽃게 집 사장은 나 몰라라 호객만 했다. 밖은 화창한 봄날인데 안은 살벌하기 그지없는 삶의 현장이었다.



결국 우리가 꽃게를 산 꽃게 집 사장님이 꽃게를 물리쳐(?) 주었다. 꽃게 집게발은 대단히 강력했다. 그 후로 사흘 넘게 손가락을 붕대 수준으로 감고 다녀야 했다.  그래도 간장게장은 역시 밥도둑이었다. 원래 발라먹기 귀찮아서 집게발은 남편을 주는데 그해만큼은 일부러 집게발 중심으로 먹었다. 감히 내게 집게발을 휘두른 죄에 대한 내 나름의 응징이었다.


그 난리를 겪고 난 후에도 해마다 굳세게 소래포구를 찾는다. 분노보다 간장게장이 더 중요하다. 잠깐의 분노를 참으면 한 달 동안 입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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