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거절하겠습니다
돌아가신 전 회장님은 비저너리(visionary)이셨다. 항상 기도로 준비하시고 앞서서 아젠다를 던지시는 분이셨다. 정주영 회장이 일이 안 될 때 “이봐, 해 봤어?”라는 말을 하셨다면 우리 회장님은 “이봐, 기도 해 봤어?”라는 말을 하실 정도로 기도를 많이 하시던 믿음의 사람이었다. 사실 회장님께 안된다고 보고를 하다가도 저 말이 나오면 기획서를 다시 써야 했다. 으... 원래 기도가 저런 뜻이 아닐텐데요... 하지만 계속해서 고민하고 깊이 생각하다 보니 해결책을 찾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는 감사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저 말은 참 무섭다...
가끔 말도 안되는 목표를 던지시면서도 함께 기도하자며 기운을 북돋우시고, 리더들은 심한 말로 나무라시지만 간사들에겐 항상 ‘사랑한다’며 꼭 안아 주시고 한없이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분이었다. 해외출장을 다녀오시면 꼭 모든 간사들을 회장실로 부르셔서 출장길에 사 오신 초콜릿을 나눠주시며 그곳에서 진행된 일들을 들려주시곤 하셨다.
회장님은 대규모 이벤트 행사를 참 좋아하셨는데 2만 명, 3만 명 모이는 메가 이벤트를 기획하라며 항상 말씀하셨다. 자선달리기와 한톨나눔축제 등 봉사자들이 몇만 명씩 모이는 행사를 진행했을 때 너무 좋아하셨고, 나중에는 중국과 한국에서 같은 날 동시에 열리는 이벤트 등 글로벌하고도 초특급 울트라 메가 이벤트를 기획했더니 획기적인 기획이라며 많이 칭찬해 주셨다. 뭐 결국 이러저러한 이유로 진행되지는 못했지만...
특별히 이벤트팀을 좋아하셨기에 따로 법인을 만들어 독립하라고까지 말씀하셨었다. NGO 최초의 이벤트 법인! 이것이 회장님의 꿈이었고 우리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실제로 유명 가수를 대표로 세우기로 하고 몇 번의 미팅과 이후 작업을 추진했으나 안타깝게도 실현되지는 못했다. 법인 이름도 지어놨었다. ‘행복한 상상’을 하자는 의미에서 ‘행상’으로 하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장돌뱅이 같잖아요 ㅋㅋ. 아무튼 그때 이벤트 법인이 생겼으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 행복한 상상이다.
그런 회장님에게도 하나의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작명 센스였다. 우리가 볼 땐 상당히 촌스러운 명칭임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는 맘에 드셨는지 자주 언급하며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며 몇 번이고 말씀을 하셨다.
한번은 항상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기아의 현황을 알리는 ‘기아의 대변자(代辯者)’가 되어야 된다고 하시면서 일반 후원자들도 홍보대사의 역할을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등장한 명칭.
‘기아 대변 대사!’ (두둥~!)
네? 똥 홍보대사가 되라구요? ^^;;
우리가 화장실 협회도 아니고,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건지는 알겠으나 이건 아니잖아요. 임명 받는 사람 입장도 생각해 주셔야죠.
회장님은 공식 석상에서 몇 번이고 ‘대변 대사’를 힘주어 말씀하셨고, 그럴 때마다 듣고 있는 우리는 웃지 못할 미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자꾸 듣다보니 배가 아픈 느낌적인 느낌도 들었다.
이후에 ‘기아 대변 대사’는 헝거 세이버(Hunger Saver)라는 이름으로 런칭했지만 들을 때마다 화장실이 떠올라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