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여의도 발표장에서 생긴 일
어떤 기업체가 우리 회사에 사보를 맡길지 결정하기 전에 브리핑을 듣고 싶다고 해서, 오늘은 여의도에 가야 했다. 사실 디자인은 내가 아닌 김 팀장의 역할인데, 최근 김 팀장이 최근 이석증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해서 대신 내가 가기로 한 것이다. 별 의도 없이 한 말일지 모르지만, 홍 부장의 “기왕이면 예쁘게 입고 가세요!”라는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내가 거적떼기를 걸치고 다니는 것으로 보였던 걸까? 예쁘고 날씬한 여자가 하는 말은 아무래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아니다. 좋게 생각하자. 나쁘게 생각하면 한도 없다. 발표자의 첫인상도 중요하겠지. 일어나자마자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지 옷장을 죽 훑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뚱뚱한 사람은 멋을 낼 줄 모른다거나 옷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정반대다. 뚱뚱한 사람일수록 어떻게든 폼이 나게 옷을 입어야 그나마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옷에 대해 상당히 민감하다. 게다가 좀 날씬하고 멋스럽게 보일 만한 디자인이 나오면, 꼭 한 번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내 친구 하나는 여자치고는 발이 커서 260인데, 그 친구의 취미가 바로 구두 수집이다. 이처럼 자기 몸에 컴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그 부분에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Fast Fashion 시대이지 않은가. 옷 값이 다른 것에 비해 그다지 비싸지 않고 이곳저곳에 의류 쇼핑몰이 즐비한지라, 나도 옷구매를 자주 하는 편이다.
사실 나는 Fast Fashion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두 해 정도 입으면 다시는 못 입을 옷이 많고, 심지어 한 두 번 입고 버리게 되는 옷도 적지 않다. 게다가 옷장에 더이상 옷걸이를 넣을 틈도 없이 가득 찬 옷을 보고 있으면, 좋지 않은 소비습관에 나 스스로가 마뜩찮다. 그리고 ‘언젠가 다이어트에 성공하면 이 옷을 입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에 작은 옷도 버리지 않고 놔두지만, 결국은 그 옷을 도저히 못 입게 되어 옷수거함에 넣게 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옷수거함에 심지어 입어보지도 못한 옷을 내다 버릴 때면, 도대체 내가 뭐하는 인간인지 혐오감마저 든다.
마침 곤색에 줄무늬가 있는 정장이 날씨에도 맞고 그럴 듯해 보여, 오늘의 ‘픽’으로 정했다. 브리핑할 때 어울릴 만한 옷이다. 안에는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기로 했다. 마침 얼마 전에 세일할 때 사놓은 흰 블라우스가 있어서 그것을 입었다. 입어보니 팔이 좀 짧았지만, 위에 자켓을 걸칠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그리고 바지를 입는데… 이게 웬걸, 너무 작지 않은가. 내가 또 살이 더 찐 것인가. 이 옷을 살 때, 이미 살이 찐 것을 염두에 두고 한 사이즈 큰 것을 구매했더랬다. 이 옷을 산 건 작년이니, 그때보다 올해는 훨씬 더 살이 찐 것일테다. 한 해 한 해 더 살이 찌고 있는 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정말 어렵다. 그다지 먹는 게 많지도 않은데, 살은 왜 찌기만 하고 빠지진 않는단 말인가.
괴로워하던 중에 이미 나가야 할 시간이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이대로 입고 현관을 나섰다. 자켓은 다행히 아직 입을 만했다. 뱃살이 찐 반면에 아직 등살이나 가슴살은 찌지 않은 모양이다. 자켓이 길어서 배 부분을 가려주고는 있었지만, 걷는 내내 허리와 배 부분이 영 불편했다. 버클로 잠그게 되어 있었는데, 잘못하다가는 버클이 뜯겨 나갈 것만 같았다. 브리핑 도중에 버클이 튕겨나가면 큰일인데… 허리에 힘을 잔뜩 주고 걸었지만, 그것만으로 여유 공간을 만들기엔 부족했다. 이미 허리와 뱃살이 너무 많이 쪄 버린 게다.
브리핑을 하는데 절반 쯤 지나니 벌써 숨이 차 올랐다. 허리가 너무 작은 탓이다. 버클이 터져나갈까봐 계속 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있다보니, 피가 올라와 얼굴까지 벌개졌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 이리 질문들이 많은지… 특히 디자인 부분은 내 담당이 아니라서 제대로 답을 못하고 버벅거렸다.
질의응답까지 겨우 마치고 급히 화장실에 들렀다. 이러다가 숨이 멎어 죽을 것 같았다. 일단 버클을 풀고 변기 위에 앉는데, 뱃살이 마치 그동안 숨죽이며 숨어있다가 오랜만에 공기는 쐰다는 듯 철퍼덕 하고 풀어졌다. 아이고 불쌍한 내 뱃살. 정말 끔찍하다. 문제는 계속 화장실에 이렇게 앉아있을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시 일어서서 블라우스를 밀어넣고 바지를 입는데, 이게 웬걸, 이번엔 바지가 잠기질 않는다. 긴장이 풀어져서일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누군가 화장실 문을 두드린다. 빨리 나가야 하는데… 다시 한 번 힘을 주고 바지를 입어 본다. 하나, 둘, 셋! 겨우겨우 버클을 잠그는 순간, 그만 버클이 튕겨나가 버렸다. 버클은 어디로 갔는지 화장실 바닥에 보이지도 않는다. 아이고나. 지퍼로만 어떻게 입어야 하는데, 위에 고정시켜주는 버클이 없으니 지퍼가 하염없이 열리고 만다.
다시 기다리던 사람이 문을 두드린다. 이번엔 좀 신경질이 묻어있는 노크소리다.
“똑, 똑똑!”
“저… 죄송한데, 제가 지금 바로 나갈 수가 없어서요.”
어쩔 수 없이 사정하는 소리로 말했다. 또각또각 멀어져가는 구둣소리. 다행이다. 내가 설사라도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민망했지만,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든다. 그나저나 버클이 없는 이 바지를 어떻게 입고 나간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볼품 없지만 블라우스를 바깥으로 빼서 허리 부분을 가렸다. 그리고 잔뜩 배에 힘을 주었다. 지퍼마저 열리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림으로 지하철은 어떻게 타지? 정말 산너머 산이다.
건물 앞에서 택시를 불렀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점심 시간이라 그런지 여의도 골목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이 다 나만 쳐다보는 듯했다. 쭈글쭈글한 블라우스 자락이 자켓 바깥으로 팔랑대며 나와 있고, 바지가 내려갈까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이상한 여자. 다들 날 미쳤거나 정신 나간 여자로 보겠지… 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이놈의 살을 기필코, 기필코 빼고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