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을 법한 이야기들
인간관계는 죽을 때 까지 계속해서 배려하고 배워나가야 하는 숙제라는 말을, 나이 지긋하신 어느 어르신이 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모나고 울퉁불퉁한 내 마음을 다듬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가 가진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잃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기 위해선 가지치기도 마다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오래 알고 지낸 나와 성향이 다른 친구가 있다. 한창 치기 어릴 때에는 그걸로 다투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그짧은 순간이 지나고나니 지금은 그 다름이 오히려 고마운 때가 많다. 이게 '틀림'의 문제인지, 아니면 그저 '다름'인 것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을 때 그 친구에게 속을 털어놓으면 내가 생각치도 못했던 다른 각도에서 문제를 볼 수 있었던 적도 많았다. 서로의 성향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면서 상대방이 잘 되길 바라는 진심을 담아 전하는 배려와 조언은 분명 큰 복이다.
개개인이 가진 색채와 모양이 다 다르기에 인간관계에 관련한 조언들은 평면의 모양을 가질 수 없고 그렇기에 'one-fits-all' 매뉴얼이 존재할 수도 없다. 10,20대에는 사람들을 많이 아는 것이 인간성이 훌륭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꾸릴 수 있다는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의 평가 기준이 되었던 것 같은데, 30대가 되어보니 이는 커다란 그림의 아주 작은 퍼즐 조각 하나뿐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의 12 Rules for Life, 혹은 타이탄의 도구들(Tools for Titans)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면 분야는 달라도 각자의 인생을 멋지게 일궈나가는 (혹은 그렇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재의 쉬움과 편안함을 능가하는 중요도를 가진 '기준들'을 가지고 있음을 본다. 나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좋은 사람 하나 잘 만나면 인생이 활짝 피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쉽게 생채기나고 가라앉는 것도 인생이라, 참 여린 우리네 인생.
나를 나은 자리로 조금씩 옮겨줄 수 있는 나름의 인간관계의 기준들을 정리해본다. 2021년 9월 기준. 추후 업데이트 가능성 무궁무진.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에서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을 찾기가 참 쉽다. 약한 사람은 착하고 강한 사람은 악하다. 그래서 신데렐라와 콩쥐는 약하지만 착했고 계모와 팥쥐는 강했지만 악했다. 이런 1차원적인 패러다임에서 철저하게 벗어나기. 강함과 약함, 선함과 악함은 정해진 짝이 없다. 갑질보다 더 못된 을질도 가득하다.
불행은 수취인을 정하지 않고 찾아온다. 사고, 병과 같은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며, 꼭 그렇지 않더라도 각자 인생, 서럽고 아쉽지 않은 사람 그 어디 하나 없다. 힘들 때 받는 위로와 배려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지만 그걸 그 사람이 당신에게 꼭, 당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원하는 만큼 해줘야 할 이유는 없다.본인이 아프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모든 걸 맞춰줄 것을 강요하는 사람, 내가 불행하니 너도 같이 불행해야 한다며 발목을 끌어내는 사람. 독이다. 망설임 없이 끊자.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말을 전했을 때 그 사람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답하느냐는 그 사람의 자유이자 영역이다. 내가 모르는 일들이 있을 수도 있고, 나와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수도 있으니 그 사람에게 넌 반드시 이런 답을 내게 줘야 해, 라고 정해놓고 그것을 하는 답정너는 결국 상대방을 내 아래로 깔고 보는 것의 연장선이 아닐까 라는 생각. 징징이도 마찬가지. 감정은 옮는다. 불행은 전염된다. 거리두기는 필수!
다른 사람들에게는 나쁜데 나한테만 좋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 본인의 일에서는 게으른데 관계안에서도 성실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 '동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누군가의 뒷담화를 한다? '나를 믿어서 이렇게 털어놓는구나'라는 순진한 생각은 접어두자.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나에 대한 뒷담화를 할 확률이 높으니. 누군가에게 혹은 자신에게 무례한 사람은 나에게도 무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언제 드러냐느냐의 시간문제일뿐.
유럽, 어느 뼈대있은 클래식 극장에서 등산복 차림을 하고 들어간 한국인부부를 본 적이 있다. 누군가가 그 드레스코드는 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대뜸 화를 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왜 가만히 있는데 뭐가 문제냐는. 그들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피한 것일 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대면해봤자 시간낭비, 에너지낭비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침묵으로 그런 사람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니 남들의 침묵을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여기는 것은 주의. 특히나 잘 모르는 일에서 그간의 전통을 거스르는 일을 할 경우는 더더욱 주의. 또 하나 첨언을 하자면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조언을 해주려고 하지 말자. 되레 공격한다.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고치는 게 아니다. 변화하려면 그 사람이 스스로 변해야한다. 자주적이지 않은 변화는 껍데기일뿐. 변화는 사실 어려운 일이라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 변화하려 노력하는 사람은 귀하다.
내가 입는 옷, 나의 위생상태는 나라는 존재의 연장선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의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어느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는 것. 항상 청결하게 하고 옷 역시 함부로 입지 않는다. 내 행동이 변하기 때문이다. 자세도 중요하다. 허리를 펴고 똑바로 걷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이 달라진다. 이것을 연장하자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한 힌트는 그 사람의 옷과 자세에 숨어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람이 내게 전하는 비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자. 본인은 못하면서 남에게만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들의 말은 들어서 뭐할건데.
힘든 일을 겪었을 때 나오는 '겸손'은 정말 겸손이 아니다. 잘 되고 높은 자리로 올라갔을 때 나오는 '겸손'이 정말 겸손이지. 예전보다 잘 되었다고 태도가 싹 변하는 사람들. 그게 그 사람이 진심이다. 티백이 뜨거운 물에 담궈져야 그 안의 내용물이 우려나오듯, 약간의 성공은 그 사람의 진가를 드러낸다.
문자던 전화던 아니면 실제로 만났을 때 내 마음에 성의가 없는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무성의한 'ㅋㅋ'문자만 날리는 사람. 내 말은 듣지 않고 자신의 말만 몇시간이고 하면서 스트레스 풀었다며 자신의 감정쓰레기를 내게 옮겨놓는 사람. 약속시간을 매번 어기는 사람. 나와 대화중인데 다른 사람과 문자하는 사람. 모두 다 심각한 경고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