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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ti PostModern Mar 18. 2024

철학과 사상에 관하여

위험하다고 하는 당신이 위험하다

1.     

 철학과 사상을 논하고 싶어도 논할 수 있는 공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아니, 철학과 사상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다. 10대부터 ‘주의(ism)’에 대해 생각하기를 좋아했고, 소위 말하는 철학을 읽고자 했다. 철학과 사상을 논할 때,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필수적으로 한다. 철학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 질문하는 것, 사상은 사고의 구체적 정리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자라난 종교적 인식과 환경, 분위기의 문제를 꼬집자면, 철학과 사상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막상 살펴보고, 들어보면 특별한 것이 전혀 없다. 알지 못하기에 겁먹는 것은 당연하지만, 겁주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한다. 철학 또는 사상을 언급하면, 똑똑한 것처럼, 아니면 신앙적으로 위험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은 나와 맞지 않다. 이런 상황 가운데, 조금씩 읽어온 책을 바탕으로 ‘알량한 나의 사고’를,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류가 가득한 글’을 쓰고자 한다. 

 철학은 죄가 아니다. 나의 사고의 바탕은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이 중심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마땅하지만, 특정 지식을 정죄하는 것은 ‘틀렸다’. 철학과 사상, 과학과 심리학, 특정 학문을 ‘죄’라고 정죄할 권한이 기독교인-나-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철학은 크게 2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어떤 학문이든 흐름이 있다. 그 흐름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철학 또는 사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렵게 느끼는 이유는 흐름을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다가오는 추상적인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폭넓은 주제이기에 어렵게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스 철학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의 철학은 ‘이야기’에 가깝다. 산업혁명 이전, 세계대전 이전의 철학자들은 언뜻 보면 자신의 논리를 채우기 위해 이야기꾼으로 변모한 것 같다. 내가 읽은 것, 대부분 비유가 가득했다.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문제는 과학의 발전, 산업혁명 이후, 세계대전 전후를 기준으로 등장한 근대 철학과 사상은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다. 특히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현대 사상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때 출간된 책은 ‘논문’이기 때문이다. 용어가 난해하고, 전제하는 부분이 매우 광대하기에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2.     

 철학책으로 구분되는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내가 철학책을 읽으면, 그것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왜’라는 물음이 쏟아졌다. 기독교를 싫어해서, 반기독교의 입장에 서고 싶어서 읽은 것이 아니다. ‘그냥 알아두면 좋을 같아서’이다. 그때마다 “철학과 사상에 빠지면 위험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한 답을 거칠게 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위험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위험하다는 말에 빠져있는 것이 더 위험하다”라는 것으로 일축했다. 

 말하기 vs 보여주기. 문학 개론 시간에 기초 이론인 말하기 기법과 보여주기 기법을 배운다. 다르게 바꾸면 ‘직접 전달하기 vs 이미지로 전달하기’ 정도로 할 수 있다.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를 다루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철학과 사상, 더 넓은 의미에서 인간 생활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철학과 사상을 말하는 것 vs 철학과 사상을 보여주는 것. 나는 전자보다 후자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철학과 사상을 말하는 것, ‘공산주의’를 말하고 있는 『자본론』을 읽는 것보다, ‘공산주의’를 보여주지만 ‘공산주의’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사상적으로’ 위험하다. 우선, 『자본론』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현실적인 이유로는 ‘너무 두껍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라면, 알아야 하는 배경지식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는 ‘해석하는 능력’이 없으면 수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애니메이션이라면 더 위험하다. 철학과 사상에 대해 어느 정도 듣고, 용어에 익숙해지면, 영화나 드라마, 매체 속에 표현된 것을 읽어내는 능력이 조금씩 생긴다. 철학 자체, 사상 자체가 위험한 시대는 지나갔다. 그 철학과 사상을 어떻게 해석하는지, 어떻게 그려내는지, 그래서 어딘가 변질된 철학과 사상을 경계해야 하는 시대가 아닐까 싶다. 따라서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철학과 사상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보여주고 있는지. 후자의 경우가 흔히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사상적이다>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3.     

 철학과 사상을 위험하다고 하는 당신이 위험하다. 이 주장은 다소 과격하다고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위험하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왜’ 위험한지 명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많이 없다.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가져온 듯하다. 자신의 무식함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가장 좋은 표본이다. 

 1950~60년대의 냉전 시기를 견딘 세대, 또는 그 이전에 사상 교육을 받은 세대라면 몸소 겪었기 때문에 사상이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세대는 대부분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식화된 사고를 버려야 한다. 공산주의를 논한다고 해서 ‘북한’ 또는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물론, 국가의 주요직 또는 정치계, 군사계에서는 해당 발언은 금해야 한다.).

 철학과 사상을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삶이 편해져서 위험 요소로 여겨진 것이다. ‘왜’ 위험한지에 대해서, 최소한의 철학과 사상은 겸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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