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확실하든, 불확실하든 마음을 정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어떤 것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확신’이라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무식하게 단언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내가 가진 확신이 무식함으로 이끌 때가 많다. 내 생각일 뿐인데, 내 생각이 옳다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을 내려놓기가 어렵다. 아래의 인용은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정신을 번뜩이게 한다.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적 해악이기도 하다. … 교조주의자는 해로운 반면 회의주의자는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조주의와 회의주의 둘 다 완벽한 철학이다. 하나는 앎은 확신하고 다른 하나는 모름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철학이 타파해야 하는 것은 이 확실성으로서, 다른 지식의 확실성이든 무지의 확실성이든 마찬가지이다. 지식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그다지 정확한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나는 이것을 안다”라고 말하는 대신 “나는 이것을 얼마간 비슷한 어떤 것을 어느 정도 안다”라고 말해야 한다. 구구단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조건이 거의 필요치 않겠지만, 실천적 지식은 셈법 같은 정확성이나 확실성을 거의 지니지 않는다.>1)
버트런드 러셀의 에세이의 일부분이다. 어떤 이는 왜, 이 글을 인용했냐고 따질 수 있다. 반기독교의 핵심 인물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냐며 인용 자체를 비판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위의 글이 비기독교인, 아니 반기독교인이 썼다고 해서 반기독교적 내용을 전개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싶다. 현대 철학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냈기에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러셀의 입장은 ‘앎을 확신하는 확실성은 해로우며, 모름을 확신하는 확실성은 쓸모가 없다’로 요약할 수 있다. 러셀은 후자를 택한다. 해로운 것보다, 쓸모없음을 추구하는 것이 비교적 긍정적이라는 입장이다.
러셀의 말처럼 확실성은 인간에게 지적 해악이 될 때가 많다. 한발 물러나서 보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쉽게 확신에 찬다. 어쩌면, 나는 회의주의를 확신했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확신하는 것보다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덜 위험하다고 느꼈다. 인간의 믿음, 확신, 신념 또는 맹목, 무지는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차라리 ‘모른다’, ‘알 수 없다’라고 일관할 때, ‘더 편했던 것’ 같다. 회의주의를 확신하는 것은 ‘확실성 오류’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오류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앎을 확신하는 확실성은 해로우며, 모름을 확신하는 확실성은 쓸모가 없다’라는 말은 인간사 대부분에 적용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신앙의 영역은 다르다. 철학의 눈으로 신앙을 이해하면, 맹목적이고 무식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를 오가는 나의 모습-기독교와 비기독교를 오가는 모습-을 본다. 이러한 고민이 고민이라고 할 만한지 잘 모르겠다. 확실성이 왜 불편함으로 다가오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다.
참고문헌
1) 버트런드 러셀, 장성주 옮김, 『인기없는 에세이』, 함께 읽는 책, 2013, p.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