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으로 읊는 시 한 수

-김춘수의 [꽃]을 다시 생각한다...

by 최명진
낮달맞이꽃과 벌~!!



장애자녀를 키우다 보니 생각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경험한다.

다른 이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커다란 장벽이 되고

그 장벽은 지속적으로 활동을 저지시킴으로 인해 위축감이나

자존감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장애자녀를 낳은 것은 분명 죄가 아님에도 사회는 장애자녀를

낳아 키우는 부모들에게 차별의 시선으로 짐을 지우곤 한다.

물론 몰라서 그렇겠지....

모르면 그럴 수도 있지. 나도 장애자녀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부분이 참으로 많으니까...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은 조금 생각해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들판에 흐드러진 개망초꽃~!!


교육을 가든, 장애 관련된 일로 토론을 하든, 또는

장애에 대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에 가끔 상처를 받곤 한다.

사실 장애부모님들도 안다. 장애에 대해서 몰라서 실수를 하는 경우는

이해가 된다. 물론 어쨌거나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일정 부분을 내려놓기도 한다.

이래서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또한 제기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들은 장애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도록 환경과 교육을 통해서

변화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장애에 대해서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쉽게 뱉어내는 말이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겉 넘어 듣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말을 불필요한 사족처럼 여기며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제도 장애 관련 정책 때문에 관계자들을 만났다가 가슴에 깊은 통증을 느꼈다.

장애인권교육을 가면 제일 먼지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애인인가, 장애우인가'

라는 질문이다.

아직도 장애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제도 대화를 나누는 중에 계속해서 담당자가

'그 애들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쓰는 상황을 만났다.

당연히 그분의 나이에 의하면 '애들'이란 말이 그다지 나쁜 말은 아닐지 모른다.

자식뻘이 되는 사람이니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자녀뻘이 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장애 당사자들이 그분들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듣는 내내 거북해서 명칭에 대해서 지적을 했다.


"지금 말씀하시는 장애 당사자분들은 대부분 청소년기가 아닌 성인들을

일컫는 것데 왜 계속해서 '그 애들'이란 말씀을 쓰시나요?

그냥 발달장애인 당사자, 또는 장애인이라고 말씀을 하시면 어떨까요?

혹시 자연스럽게 쓰는 언어 속에 인지 수준이 낮으니 신체 연령과 상관없이

'그 애들'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닌가요?

역지사지 해보세요... 계속 들을수록 거북해집니다."

라고 말하니 나보고 너무 까칠하다고 말씀을 하셨다.

사적 관계가 아닌데 어떻게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당신들에게는 다 아이로

지칭될 수 있는지 역지사지해보시라 했다.

그분들이 장애가 없었어도 그리 불렀을지에 대해 역으로 물었다...



교육을 나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아이들은...'이라고 말씀하시는 곳을 이용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종사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경우가 있는데도

어찌하여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피터팬처럼 만년 청춘이 될 수 있느냐 말이다.

인지 수준이 낮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그리 불러도 되는가?

내가 교육을 나갔을 때 '호칭'의 중요성을 누차 말하는 이유이다.

정신연령이 아닌 신체 연령에 의한 호칭이 마땅하지 않은가.

장애가 있는 분들이 장애가 없었다면 그때도 '그 애들은'이라고

부르겠는가 말이다.



친근감의 표현을 뭐라 하고 싶지는 않다.

친근한 사람에게는 그들 나름의 호칭이 당사자에게 불편한 호칭이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나무라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함부로 불려지는 것에 대해서도

인식을 하지 못하고 멋대로 불려지는 성인 장애 당사자가 많다는 것이다.

'장애우'라는 친근한(?) 표현이 '장애인'으로 바뀐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건가.

그것도 장애 부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표현방법에 대해서 말을 하는 내가 까칠한 사람인 것처럼 불편해하다니...

어디 가서 '우리 애들'이란 표현을 썼을 때의 당신의 인격에 가해지는 시선을

그들을 아직도 모른단 말인가.



정말 장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관심이 있으며

누구보다 애정이 많다고 하는 그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누구의 말처럼 그게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태클을 거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호칭이 가지는 특수성에는 상대에 대한 존중감이 또한 포함된 것이기 때문이다.

'~씨', '~님', '~선생님', '~실장님' 등...

우리가 평소에 상대를 부르는 호칭에는 그에 맞는 격식이 있는 것인데

왜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겐 예외가 된단 말인가.


사람이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는 것 중의 하나가 '역지사지'가 가능하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내가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살 수 없다)

상대의 입장에 내가 서 있으면 모두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우린

이해를 할 수 있지 않은가.

누군가 내 나이를 내가 처한 환경에 비춰 함부로 부르고 아이 취급한다면

당신은 기분이 좋겠는가.

장애 특성상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당사자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진대...

우리 스스로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들의 장애는 그동안 무심히 스쳤던 모든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을 만들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 내 아들이 있고, 그 아들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특별히 배제되기도 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함부로 대접을 받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요즈음 유난히도 내 가슴에 스미는 시가 하나 있으니 바로

학창 시절에 만났던 김춘수의 [꽃]이란 시다.

내가 이 시를 '사랑'의 감정이 아닌 '존재'의 이유를 들어 이렇게 가슴에

새기고 살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물론 장애 당사자에게 물어보면 '장애인'으로 불리는 것도 싫어한다.

다만 나의 이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친분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애들', '야~~' '너~~' 등으로 함부로 불리는 것에는 상당한 불쾌함을

나타내곤 한다.

이름을 알면 당연히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현장이나 장애인이 이용하는 현장에서는 여전히

'걔~( 그 애)로 불리며, 나이를 잊은 강제된 피터팬이 많다는 것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이것이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 인식의 현재이다.


학폭위가 일어나 찾아간 장애 당사자 부모님이 한 번 더 무너졌던 것도

바로 호칭에 의한 것이었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에게는 '**학생'이라고 말하면서, 피해자인 장애학생에게는

'장애학생'으로 일관하더란다. 학교에서도 장애학생의 이름을 알 리가 없고

그것이 당연한 듯 그렇게 말하고 있더란 것이다.

이름조차도 없는 장애학생, 그렇다면 학교 현장에서의 존재감은 어떨까?

김춘수의 [꽃]이란 시가 가슴으로 칼질을 하듯 스미는 이유이다.




아름답게 어우러진 개망초와 금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