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아보게 하는 트라우마

-[채식주의자]를 통해 직면한 나의 트라우마

by 최명진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나의 선택은 그다지 중요해지지 않았다.

가고 싶지 않다고 가지 않아도 되는 선택은 그다지 현실적이지 않았기에...

특정하게 어렵고 부족해도 주어지면 당면한 일을 해내야 하는 현실의 문.

그 현실의 문을 과감하게 박차고 나아간다는 것은 또한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는 일이 사무실에 앉아서 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이다 보니 그만큼 돌아다닐 수 있는 확률이 많은 내 생활.

특히 교통수단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버렸다.


아는 곳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럼에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환경이 주는 트라우마가 작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트라우마는 무엇일까?

사실 굳이 트라우마를 떠올리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지만 주어진 삶을 살아가다 보면 불쑥불쑥 떠오르는 두려움 저편에서

만나는 나의 경험들이 그렇게 순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떠올리며 돌아보게 된다.

유난히 버스 타기를 두려워하는 나의 이면에는 그것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내재되어 있음을...


국민학교 5학년과 6학년 2년 동안을 구멍가게를 하는 부모님을 돕는 일환으로

도매상점에 가서 물건을 떼 오는 역할을 했었다.

지금도 하늘보다 땅이 훨씬 가까울 정도로 키가 작지만 그때도 앞자리를 면키 어려울

정도로 작았던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사, 누에치기, 광산까지 다니는 아버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가족은 가족으로서 각자의 역할을 나누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맡았던 한 부분이 바로 첫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서 두어 개의 도매상점에 가서

필요한 문구와 군것질 거리를 사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것을 했냐고 물으면 딱히 떠오르는 이유는 없다.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일에 치인 부모님을 돕는 하나의 방법이었다는 것 이외엔...


첫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서 세 군데의 상점을 돌아 물건을 떼는 것은

나름 호기심 많은 내겐 즐거운 경험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키도 조그만 녀석이 이른 아침에 시내에 나와서 문구류와 군것질거리를 떼러 가면

상점 주인들은 기특함 반, 안타까움 반으로 부서져 팔기 어려운 과자나 문구류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내 몫이라고 챙겨주시기도 했었으니까.

누군가의 칭찬을 받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을 행하는 방법이었다.


비가 오던 어느 봄날,

그날따라 나는 세 개의 박스 포장을 해서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었다.

물건을 떼러 갈 땐 첫차라 여유있게 갈 수 있었지만, 돌아올 땐 출근하는 분들의

출근시간과 겹쳐 겨우 타기가 가능할 정도로 빡빡한 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날은 생각보다 버스가 빨리 왔다.

박스가 세 개이니 구박을 먹지 않기 위해 서둘러 난 버스에 올랐고, 생각보다

성근 버스 안에서 나는 용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각지에서 버스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길을 트는 것을

본 순간, '아차' 싶었다.


깜짝 놀란 나는 차장에게 버스를 세워줄 것을 요청했고,

빳빳하기 그지없는 권력을 지닌 남자 차장은 거칠게 차를 멈추도록

소리를 질렀고, 소중하게 포장되었던 박스 세 개는 비가 내리는 거리에

내동댕이쳐졌다. 과자도 아닌 문구류 박스가 속내를 드러내며 흩어졌고

난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눈을 덮어가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흩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박스에 담았다.

그리고 정신을 수습할 즈음에 내가 타려던 버스가 저쪽에서 다가왔고

그렇게 물에 빠진 생쥐가 된 나는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이 나를 어찌 바라봤는지, 내 꼴이 어찌 사나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동공이 풀린 채 비에 젖에 구겨지고 찢어진 박스가 다시 흩어지지 않게

두 다리로, 손으로 움켜잡았던 기억밖에는 없다.

내가 내릴 곳에 다다라서야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우리 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박스를 내렸고 그렇게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상품으로 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엄마께 혼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두려움의 최고봉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일 이후로 난 버스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버스로 통학을 하는 여고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어서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맨 부커 인터내셔널상이 무엇인지 모른다.

작가 한강이 수상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해봤고

그렇게 난 [채식주의자]를 만났다.

그리고 책을 주문하고서 뒤적뒤적하다가 책 보다 먼저 2007년작인 영화를 먼저

만나게 되었다. 무심결에 보기 시작했다가 넋을 놓고 보았던 영화였다.

이상하게도 안타까움이 내 마음을 강타하고 있었다.

영혜의 그 심상도, 그녀의 형부도, 그녀의 언니도, 그녀의 남편까지도...

그들의 심상을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충분히 그 직면한 상황에서의

그들의 선택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기에 더욱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어쩌면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이란 것을 접하지 않았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내게 의미 없이 지나는 바람이었으리라.

표지를 장식하는 작가의 표정이 어쩜 그리도 책의 내용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는지...

작가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은

영혜를 중심으로 그녀의 남편, 그녀의 형부, 그녀의 언니가 서술자가 되어

풀어가는 관점 또한 매력적이고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내내 말라죽어가는 영혜에 대한 안타까움을 멈출 수 없었다.

"왜, 죽으면 안 되는 거야?"... 영혜의 한 마디~!!!


물 위를 유영하는 소금쟁이~!!!
시계꽃~!!


그냥 고기를 먹지 않으려는 것뿐인데...

그녀의 선택은 다른 이에게는 선택이 아닌 이상한 행동이 되었음을...

어린 시절 그녀가 겪은 개고기에 대한 경험, 꿈에 의한 그녀의 선택...

몽고반점에 매료되어 예술혼을 불사르고 싶었던 영혜 형부의 선택...

주어진 환경에 한 번도 반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견뎌 살아낸 영혜 언니의 선택...

특별함이 없다는 자체로 무미건조하게 아내를 선택했던 영혜 남편의 선택...

우리의 삶 한 부분에도 있음직한, 그러나 평범하지 않기에 과감히

선택하지 못하는 우리네의 삶의 이면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는 뜻밖의 고통을 느꼈다. 아야 할 시간이 다시 기한 없이

남아있었는데, 그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한 달 동안 염려했던

큰 병의 가능성은 오히려 사소한 번민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영혜가 비디오를 찍던 해의 봄에 영혜 언니가 느꼈던 그 심상이 왜 그리도

내가 다가와 남는 것일까?

주어진 삶을 그저 성실함으로 일관했던 그녀가 살아본 적이 없는, 그냥

견뎌냄으로 일관한 그녀의 삶이 날카로운 송곳에 찍힌 거먀냥 아프고 아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싶은 마음...

그래도 살아있음을 자각하고파 소리 내고 행동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는

장애아들이 있음을 감사해야 하나?


트라우마~!!

내게 있어 가장 큰 트라우마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그 충격적 경험은 늘 버스를 타는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몇 번을 확인해도 혹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여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다잡으며 지금에 이르렀음을...

이상하게도 [채식주의자]를 통해 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경험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게 발견할 수 없는 이 허접한 두려움에 피식 웃음을 날린다 해도

내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되었던 그 경험... 그리고 영혜와의 만남...!!!


장애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어쩜 또 다른 트라우마가 될까?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을 다 이해하고 수용할 수는 없다 해도

그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선택에 대해 최선을 다해 함께 해야 하지 않을까.

자폐성 장애 자녀를 키우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던 이 경험도

또 누군가에겐 이해할 수 없는 삶이자 견뎌내는 것으로만 보일 수도 있음을...

장애자녀를 키우는 어머님들과의 휴식지원 여행을 다녀오며 책을 덮는 나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한 [채식주의자]~!!!

그리고 영혜, 영혜, 영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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