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저귀 갈아주는 것이 처음엔 무척 낯설더라고요. 당시에 저는 자녀가 없는 남자였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동료 교사의 시범을 받고 하다 보니 뭐 딱히 어려운 건 없었습니다. 1시간 간격 정도로 교사들이 돌아가면 기저귀 찬 아이들을 불러서 갈아줬습니다. 중간중간 똥을 싼 아이들은 바로 갈아주고요. 온갖 인종이 섞여 있다 보니 다양한 똥 냄새를 맡았습니다. 가장 지독했던 건 인도 아이들이었습니다. 카레가 강력하긴 합니다.
제가 가장 오래 일했던 센터는 외국인 선생님이 정말 많았습니다. 헤드티처는 피지 사람이었고 그 밑으로 필리핀, 스리랑카, 인도, 중국, 퍼시픽 사람들이 있었어요. 물론 현지인도 있었고요. 피지 헤드티처는 덩치가 산만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도 꼼짝 못 하고 말을 잘 들었지요. 현지인이 아니라서 말투도 "you do that, you do this" 이런 식의 힘든 느낌이었습니다. 결국엔 매니저와 여러 이유로 충돌을 하더니 그만 두시더군요. 그리고 필리핀 분이 새로 오셨는데 기존에 있던 필리핀 선생님과 미묘한 다툼이 생겼어요. 서로 얘기도 안 하고 굉장히 불편한 분위기를 만들곤 했죠. 어딜 가나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고 갈등이 있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확실히 뉴질랜드가 사람에 관한 스펙트럼이 더 다양한 것 같았어요. 그만큼 다이내믹한 인간관계를 엿볼 수 있죠.
Reliver로 일할 때 현지인 선생님들이 가득했던 센터에서 3주 정도 일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센터에 20대 젊은 백인 선생님이 계셨고 50대 정도 되는 주방에서 일하는 kitchen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둘이 시도 때도 없이 친구처럼 장난을 치더군요. 근데 제가 보기엔 약간 노인 학대라고 해도 될 정도의 강도로 장난을 주고받았습니다. 물론 때리거나 그런 건 아닌데 psycho라고 하면서 놀리고 kitchen 자동차에 낙서를 하고 그랬어요. 이게 도저히 가능한가 싶은 장면들이 눈앞에서 벌어졌습니다. 저도 나름 생각이 열려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죠. 선진국의 평등지수는 제가 생각한 선을 넘더군요.
같은 센터에서 일할 때 일입니다. 그곳에 어린애 한 명이 발달이 약간 떨어지는 아이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어머님도 약간 사회성이 부족한 분 같았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말도 많이 걸어주고 한국어도 조금 할 줄 아시더라고요.(그분은 현지인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큰 거부감이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제가 Reliver라서 몰랐는데 센터 선생님들은 그분을 약간 기피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아침에 센터에 아이를 데리러 와서 같이 놀고 계시더군요. 저도 옆에서 같이 놀아주면서 아이를 안아줬습니다. 그런데 그 엄마가 자기도 안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뉴질랜드에서 워낙 포옹이 일반적이어서 가볍게 안아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센터 선생님들이 놀리더군요. 자기도 안아달라고 하면서. 얼떨결에 성희롱도 당하고 선생님들한테 조롱도 당했네요. kitchen이 그래도 위기를 잘 넘겼다며 위로도 해주더군요. 자기였으면 도망쳤을 거라고 하면서요.
센터에서 마지막으로 일하는 주간이었어요.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아이들도 센터에 많이 안 나오고 조금은 여유롭게 일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죠. 그런데 다른 선생님이 저보고 아이들이랑 산책이나 다녀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다른 선생님 한 분과 함께 동네로 산책을 하고 왔습니다. 처음으로 같이 밖을 나가 본 것이라 아이들도 저도 신났었죠. 한참을 놀다가 들어왔습니다. 알고 보니 제 서프라이즈 파티를 하려고 일부로 센터 밖으로 보낸 것이었어요. 한국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감동이었습니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함께 만든 앨범과 여러 가지 선물을 준비해 줬습니다. 아직도 제 침실 위에는 그 선물이 걸려 있어요. 뉴질랜드에서 나는 푸른색 돌로 만든 목걸이지요. 낯선 나라 동양인 남자에게 따뜻한 마음을 열어준 여러 선생님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제 인생에서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