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죠. 제가 능력이 있거나 인맥이 있지 않았지만 '초등교사 자격증'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저는 무난하게 기간제 교사 일을 바로 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교대를 졸업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장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사를 할 거면 다시 정교사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보낸 2년 동안 제대로 교사 일을 해보고 싶다는 '의욕' 같은 것도 생겼고요. 그래서 저는 임용고시를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학교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신 있었습니다. 처음 쳤던 임용고시에서 꽤 좋은 성적을 받기도 했고 교직 경험도 있으니 수월하게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겠다 싶었죠. 융통성이 부족한 성격이라 게으름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공부를 했습니다.
정교사 시절에 많은 기간제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기간제는 저와는 다른 '부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계층으로 따지면 제가 더 높은 계층이었죠. 저는 성공한 사람 그리고 그들은 패배자였습니다. 측은한 마음이 들더군요. 불안정하고 힘든 삶을 살고 계시진 않을까라고 마음속으로 위로를 하기도 했습니다.(다행히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 있음에 안도하곤 했죠. 꼰대를 혐오했지만 누구보다 꼰대처럼 살았습니다.
제가 처음 기간제로 일하는 동안 부끄럽거나 불편한 게 없었습니다. 당장은 기간제지만 곧 다시 정교사가 될 사람이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공부도 하고 일도 해봤던 '정교사' 출신 기간제라는 조금은 특별한 이야기를 가졌다는 생각에 우쭐한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에 다시 합격하고 정교사로 복귀해서 멋진 그림을 완성시킬 작정이었습니다. 그런 오만함으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다른 기간제 분들께 조언이랍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들려주고 응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과거로 돌아가서 입을 주먹으로 세게 치고 싶네요.)
시험 결과는 1차 불합격이었습니다. 참 많은 감정들이 몰려왔습니다. 웃기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제가 당연히 합격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터라 항상 자신감 있게 말을 했던 탓일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불합격이라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더군요. 곧이어 1차도 통과하지 못했다는 패배감, 곧 태어날 아기가 있는데 어떻게 다시 시험을 준비할까 하는 막막함, 불확실해진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몰아쳤습니다. 생각보다 충격이 크더군요. 시험이야 떨어지면 다시 치면 된다는 마음은 항상 갖고 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제가 힘없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겉으론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했습니다. 몇몇 학교 사람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괜찮은 척 소식을 전하기도 했죠. 시험에 떨어졌다는 말을 하기 싫어서 사람들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아내에게는 부끄러운 감정이 들진 않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제가 합격했더라면 아내의 마음도 편했을 테니 말이죠. 그래서 더 담담한 척, 괜찮은 척했습니다. 그런데 제 연기가 정말 별로였나 봅니다. 아내가 저를 보더니 괜찮은 척할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힘들고 슬프면 표현을 하라고 위로해 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내 곁에서 울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진짜로 30 중반 아재비가 시험 떨어졌다고 울었습니다.
임용고시에서 떨어진 후에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감정을 만났습니다. 바로 미래에 대한 불안함, 불확실성이었죠. 저는 교대에 다니기 전에 공과 대학을 꽤 오래 다녔습니다. 3학년으로 복학을 했을 때 정말 힘들더군요.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뭘 잘할 수 있을지,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같은 수많은 질문 속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천국과 지옥을 오갔습니다. 참 힘든 시기였고 결국에 전 교대라는 안전한 길을 택했습니다. 교대를 다닌 이후부터는 딱히 이런 고민과 불안이 없었어요. 어쨌든 정해진 길이 있고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꽤 오래 기간 안전한 울타리에 안에서 실패 없이 살다 보니 많이 나약해졌나 봅니다.
다시 시험을 치고 싶진 않았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마음이 별로 끌리지 않더라고요. 불안함은 여전했습니다. 이 문제는 해결해야 했죠. 뭘 해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봤습니다. 운동, 명상, 독서처럼 마음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당장 효과가 나타나진 않더군요. 생각보다 꽤 오래 지속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에 하지 않던 몇 가지 행위들이 제 삶에서 중요한 습관이 됐습니다. 게다가 믿고 따를 철학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그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을 먹었죠.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처럼 뭐라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저는 여전히 기간제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측은하게 생각하던 기간제로 꽤 지내다 보니 융통성도 생기고 겸손함도 많이 배웠습니다. 이제는 주변 선생님들의 힘듦을 이해하고 제가 먼저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이 큽니다. 담임교사로서, 부장교사로서, 관리자로서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도 그런 무게를 견디고 있기도 하고요. 덤으로 도와주는 기쁨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기간제는 아주 적은 업무량을 가져갑니다. 어쩔 땐 죄송스럽기도 하더군요. 이번에 기간제 면접에 합격하고 나서 교감선생님이 제 업무 배정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래서 그냥 교감선생님 업무분장하시기 편하게 배정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제 마음이 오히려 편했습니다.
기간제로 지내면서 종종 불안함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안함이 그렇게 싫지는 않습니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경고등이 켜지는 느낌입니다. 정신이 번쩍 들지요. 저는 더 이상 안전한 울타리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 찾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생존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하나씩 얻다 보면 오히려 더 안전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산에는 가끔씩 산불이 나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인화성 물질이 쌓이지 않고 큰 화재를 막을 수 있는 것이죠. 때론 산을 보호하는 행위가 산을 모두 태워버릴 수 있는 대형 산불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생을 돌이켜 보면 꽤 아찔했던 순간들이 있습니다. 운이 좋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제가 있는 것이죠. 그리고 제 능력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고요. 제 능력의 한계를 알고 운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이제는 그런 큰 위험은 짊어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책임져야 할 식구가 늘었기 때문이죠. 잃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위험을 걸 생각은 없습니다. 꼭 지켜야 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이외에는 전부 위험을 걸어 볼 생각입니다. 위험을 걸어도 죽을 일이 없으니까요. 생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남다 보면 가끔은 저에게 또 다른 행운이 찾아오는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