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2019년 1월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약 6개월 정도의 짧은 연애를 했습니다. 결혼식 직후에 바로 뉴질랜드로 떠났습니다. 뉴질랜드에서 2년을 보냈고 그 기간 동안 코로나 Lock down기간을 겪으면서 하루 종일 붙어있던 시간이 정말 많았었죠. 한국에 돌아와서도 부부교사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둘 다 친구 만나고 밖에서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다 보니 함께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고요. 아마도 저희 부부는 다른 부부들이 10년은 넘게 결혼생활한 시간과 거의 맞먹는 대면(face to face) 시간을 갖지 않았나 합니다.
꽤 압축된 결혼생활을 해왔지만 지금까지 저희 부부는 싸운 적이 없습니다. 자랑하는 건 아니고 그냥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만나본 사람 중에 안 싸운 커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희 부부는 저 자신에게도 굉장한 희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혹시나 억지로 짜 맞춰진 혹은 숨겨진 관계의 조각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찾아낸다면 얼른 도려내고 수정을 해야겠습니다.
첫 번째 싸우지 않는 이유는 저희 부부 모두 공격력 0 방어력 100이라는 밸런스 붕괴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부는 과거사 탐문을 통해 과거 연인들과 치열하고 더러웠던 진흙탕 싸움을 했다는 사실을 서로에게 자백했습니다. 인간성의 밑바닥까지 모두 찍어봤던 전력을 고백했으며 그때의 고통스러웠던 감정도 공유했죠. 그렇기 때문에 저희가 아예 싸우는 게 불가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확인했습니다. 다만 분석결과 먼저 물어뜯고 덤비는 싸움닭 성향의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일단 기분이 나쁘더라도 먼저 시비를 털거나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선 회피를 하는 편이죠. 맞붙을 상대가 사라지니 일단 전쟁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실 회피형은 공격형보다 더 악질입니다. 사람 미치게 하는 유형이죠. 하지만 다행히 저희는 회피형 답답이들은 아니고 시간이 흘러 마음이 풀어지면 기분 나빴던 일들을 전부 쏟아 냅니다. 고해의 시간을 갖는 것이죠. 화가 별로 없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사과도 하고 오해가 있으면 서로 풀면서 마음속의 앙금을 털어버립니다. 어느 정도 각자 연애 경험도 있고 정신적으로 조금은 성숙한 뒤에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나리오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와이프와 사귀기 전에 너무 힘든 연애를 했기 때문에 지금의 아내와는 그때의 감정을 또 느끼고 싶지 않았습니다. 한 번 강을 건너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싸움이 아닌 다른 방법들을 택하게 된 것이죠. 다행히 그때의 다짐을 지금도 잘 지키고 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살다 보니 습관이 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서로에 대한 발작버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격, 습관, 외모, 취미, 성향, 살아온 환경, 부모님, 형제, 친구처럼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특성은 부서진 유리 파편처럼 누군가와 서로 맞춰 봤을 때 거의 맞지 않는 굉장히 까다로운 퍼즐조각입니다. 보통 노력이나 수행 같은 방법으로 서로의 조각을 다듬고 부수며 모양을 맞춰갑니다. 이 과정이 아마도 많은 부부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겠지요. 하지만 운이 좋게도 저희 부부가 갖고 있는 조각은 꽤나 잘 들어맞았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서로에게 거슬리는 부분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조각이 조금 더 까다로웠던 것 같은데 굉장히 무던했던 아내의 조각에는 별로 타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도 무던해진 것 같고요.
세 번째 이유는 저희가 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같은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게 교사라는 점은 꽤 큰 장점입니다. 교사는 일반적으로 외부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꿀 빠는 직장인으로 비칩니다. 근래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인 일들로 인해 교사의 고충이 세상에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방학과 철밥통 등의 이유로 꿀보직 상위 랭킹에서 잘 내려오진 않고 있죠. 뭐 이해합니다. 일반 직장인이 겪어야 하는 고충에 비하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남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고충을 저희 부부는 서로 알아채고 받아줄 수 있습니다. 같은 경험을 하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하면서 겪는 스트레스를 누구와 함께 공유하고 풀어갈 수 있다는 건 굉장히 큰 행운입니다.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집안에서 갈등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희는 오히려 직장 스트레스로 더 단단해질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면서요.
교사는 시간이 다른 직업군에 비해 비교적 여유롭습니다. 일반적으로 부부 사이에 다툼이 생기는 시기가 발생하는데요. 주로 아이가 태어난 후에 그렇습니다. 그만큼 정서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든 시기입니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24시간 육아가 풀가동되기 때문에 굉장히 많은 에너지가 쓰입니다. 공감하시겠지만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자제력이 바닥나면 배려고 뭐고 일단 나부터 살아야 된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정신을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싸움이 시작되죠. 다행히 저는 육아시간을 쓰면서 집에서 쓸 에너지를 비축할 수 있습니다. 그 덕분에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죠. 그리고 아이가 나오고 체력이 너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벌써 거의 삼 년 동안 꾸준히 운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체력이 좋아지면서 화내고 싶은 마음이 더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다른 직장을 갖더라도 가정을 위해 체력을 꼭 아껴두려고 합니다.
시간이 많은 만큼 집안 일과 육아를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밖에서 일하는 시간과 버는 돈에 비례해서 가사 일과 육아 시간이 분담될 가능성이 큽니다. 뭐 합리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부부는 똑같이 학교 생활을 하기 때문에 누가 가사와 육아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할당량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닥치는 대로 했죠. 각자 더 잘하는 일들을 열심히 하는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집안 일과 육아를 하면서 생길 수 있는 갈등이 잘 생기지 않는 편이고요. 이왕 하는 거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운'입니다. 솔직히 앞서 말한 것들 그리고 그 외에 자잘하게 많은 이유들이 저희 부부가 싸우지 않는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나름 분석이라고 했지만 사실상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운이 가장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라는 사람, 그리고 아내라는 사람이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앞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향이 우연히 잘 맞아떨어져서 지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이죠. 사람은 복잡하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성은 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를 알아채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다만 개인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서로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한다면 더 좋은 운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좋은 생각, 건강한 노력, 깊은 대화가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싸울 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