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저도 한 땐 소비충이었습죠

by 삽질

오늘 정근수당이 들어왔습니다. 아내도 받으니 오늘만큼은 통장이 두둑한 느낌입니다. 기분이 좋긴 하지만 제 일상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제가 받은 돈은 증권계좌로 옮겨서 전부 모아둡니다. 적절한 때에 필요한 금융 자산을 구매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서죠. 굳이 오늘의 기분을 즐기고 싶다면 저녁에 치킨 한 마리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참 자극 없는 무료한 파티네요.


예전에는 많이 달랐습니다. 돈을 가볍게 여기던 총각 시절에는 어떻게 하면 소비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대부분을 시간을 보냈었죠.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면서 주제에 맞지도 않는 좋은 옷을 사고 비싼 음식도 먹으러 다녔습니다. 방학만 되면 방학 기간을 꽉 채워서 여행 일정을 잡곤 했습니다. 수중에 돈은 없지만 앞으로 따박따박 나올 금액을 고려해서 앞으로의 소비도 꼼꼼하게 챙겨놨습니다. 제 신용카드의 할부금액은 자동적으로 머릿속으로 계산되고 사용할 수 있는 여유 분을 마이크로 매니징 하며 소비했습니다. 다행히 현명한 어머니를 둔 덕에 월급의 일정 부분을 어머니가 가입한 계모임에 적립했습니다. 당시 제 유일한 재테크였죠.


약간의 변명을 하자면 제가 총각시절 만나던 사람(지금 와이프 아님)이 상당히 씀씀이가 컸기 때문에 제 소비의 기준이 높아졌기도 했습니다. 제가 살면서 전혀 해보지 않은 행위와 장소를 그녀 때문에 경험했었죠. 돈은 없는데 눈만 높아지니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바닷물로 해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소비는 하면 할수록 더 구미가 당겼습니다. 더 좋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제가 가진 것들을 감사히 여기지 않았죠. 소비와 비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비교를 더 많이 하고 그만큼 소비도 더 하게 되고 다시 비교를 하는 악순환이 완성되곤 합니다. 소비에 집착할 당시에 저는 남들과의 비교로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러 이유로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물질의 늪에서 빠져나와 정신적 가치를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죠. 아내를 만날 시기가 제가 변화를 시작하는 시기와 딱 맞물렸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제가 조금은 짠돌이고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결과적으로 건강한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아내도 동의하는 눈치이고요. 사실 아내도 소비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시기를 고백했기 때문에 소비가 가져다주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저희 둘 다 이런 경험을 마무리 지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는 소비를 잘 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소비하는 품목은 치킨과 햄버거인 듯합니다. 용돈 30만 원에서 맛있는 거 먹고 남은 돈은 책 사고, 머리 깎고, 필요한 옷 사고, (아주 가끔) 친구 만나고 이 정도입니다. 충동적인 소비나 유흥비가 제로에 가깝지요. 아내는 저보다 더합니다. 아내는 이제 소비를 안 하는 비구니가 된 듯한 모습입니다. 자기 옷도 그냥 저보고 대신 사 오라고 할 정도니까요. 제가 인터넷에서 골라서 보여주고 마음에 들면 사는 식입니다. (제가 좋은 옷 싸게 사는 능력은 기가 막힙니다.)


소비에 대한 욕망이 줄어든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우선 아내나 저나 소비 이외의 행위에 꽤나 몰입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단 육아를 열심히 하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글을 쓰는 데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 같습니다. 아내는 글을 읽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쓰고 있고요. 그리고 아내는 개인적으로 예술과 기술을 연마 중이기도 합니다. 소비보다 즐거운 행위에 시간을 쏟다 보니 굳이 소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엔 시간이 많고 할 일이 없으니깐 소비를 하게 된다는 결론이 나오네요. 몸이 바쁘고 정신이 건강하다면 굳이 소비가 필요 없어집니다. 그리고 세상엔 소비보다 즐거운 행위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두 번째는 돈은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저축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뉴질랜드에서 2년을 살면서 많은 자금을 탕진하고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아파트 대출금도 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니 허리띠를 자연스럽게 졸라 매야 했습니다. 돈에 대해 너무 모르니 돈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렇게 투자를 시작했죠. 저희 부부는 아이를 낳고 3년 동안 가정 보육을 했으니 들어오는 돈이 거의 없었습니다. 올해 처음 맞벌이를 시작했습니다.(숨통이 좀 트입니다.) 그럼에도 허투루 돈 쓰지 않고 따박따박 모은 돈으로 투자를 하다 보니 생각보다 꽤 큰 금액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저축이 소비보다 재미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죠. 그래서 지금은 한 사람이 버는 돈을 전부 모으고 있습니다. 소비할 때보다 훨씬 즐겁고 유용합니다.

소비를 별로 하지 않고 살아보니 굳이 소비가 꼭 필요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나이에 따라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나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소비에 대한 입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소비는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유혹임은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하죠. 전 세계의 모든 시스템 자체가 더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하도록 만들기 위해 돌아가고 있기도 하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소비를 한다는 건 자기 주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외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내 의지로 소비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소비 이상으로 아름다운 가치가 존재합니다. 그 가치는 개개인마다 다르겠지만 그걸 찾고 삶에 녹인 수 있는 건 본인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에 매몰되지 않고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만들었면 좋겠습니다. 저도 여전히 노력 중이고요.

keyword
삽질 가족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구독자 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