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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라는 면죄부

by 삽질

나이가 40에 가까워지니 이젠 아저씨가 됐음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은 아직 준비가 안됐지만 외모는 완전히 준비를 마친 상태가 됐으니 별 수가 없어 보입니다. 40은 제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숫자였는데, 시간이 참 빠르고 야속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고 아저씨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을 때도 있죠. 아저씨이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점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딱히 보여줄 필요가 없는 모습이거나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이지만, '아휴, 아저씨니깐 이해하자.' 이 정도의 반응으로 쉽게 갈무리될 수 있는 것이죠. 아저씨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면죄부가 생긴 셈입니다.


<코 밖으로 나온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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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신진대사도 점점 줄어야 하는데 코 속에서 자라는 시커먼 놈들의 성장력은 전성기를 맞은 것 같습니다. 주기적으로 관리를 한다고 하지만 어느샌가 빼꼼하고 나와 코끝을 간지럽힐 때가 있습니다. 남몰래 눈물을 찔끔 흘리며 귀엽게 나온 녀석들을 바깥세상으로 완전히 퇴출시키곤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놓칠 때가 있죠. 운전을 하고 있으면 옆자리에 앉은 아내가 코털 좀 뽑으라고 합니다. 도대체 남자들은 코털이 왜 이렇게 많냐고 핀잔을 주기도 하면서요.(밝은 분위기입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함께 살아가는 친구 정도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요. 가끔 친구 녀석들을 만나면 아예 대놓고 기르는 것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뭐 그러려니 합니다. 애도 키우고 돈도 벌어야 하는데 코털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요?


<15년 만에 준코>

지난주 저녁 5시 30분쯤 대학교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교대 다니기 전 대학교) ㅊㅇ가 한국에 와서 오늘 대학교 동기들과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ㅊㅇ는 필리핀에 파견돼서 일 년에 한 번씩만 한국에 들어옵니다. 6,7년이 넘도록 친구들을 못 본 터라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친구는 다른 애들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 얼른 오라고 합니다. 서울 종각까지 버스 타고 가면 시간이 꽤 걸리지만 아내에게 급하게 허락을 맡고 부랴부랴 올라갔습니다.


도착하니 8시가 다 됐더군요. 친구가 알려준 치킨집 2층으로 올라가니 대학교 동기 7명 정도가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스르륵 자리에 앉아 애들을 쳐다보니 다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랍니다. " 뭐야! ㅁㅊㅅㄲ 어떻게 왔어??". 절 초대한 친구는 옆에서 연신 낄낄거립니다. 오랜 해외 파견으로 제 결혼식에도 못 왔던 ㅊㅇ는 절 어찌나 반기던지 계속 손을 잡고 어깨동무를 합니다.(이미 취해 있었음) 남들이 봤을 땐 다들 늙은 아저씨들이지만 제가 친구들을 볼 때마다 20살 풋풋했던 모습이 잔상처럼 얼굴에 아른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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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꼬치집에서 3차를 끝내고 마지막 4차를 갔습니다. 갑자기 친구 한 놈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며 준코로 저희를 데려갑니다. 평소 노래방을 절대 가지 않는 저이지만 친구들 분위기를 망칠 순 없으니 못 이기는 척 끌려갑니다. 추억의 준코입니다. 아직까지 이게 살아있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여길 이 나이 먹고 들어간다는 것도 웃기더군요. 어쨌든 만취한 아저씨들은 추억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아마 저희 방 밖에서 듣고 있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휴 저 개저씨들"이라고 할 법한 레퍼토리가 진행됩니다. 제가 준코에서 찍은 사진을 아내에게 보여주니 경악을 합니다. 제가 봐도 딱히 유쾌한 모습은 아니더군요. 그래도 뭐 어떻습니까. 아저씨들도 추억이 있고 낭만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겉은 이래도 안은 여전히 청춘이랍니다.


<편한 게 최고야>

20살 땐 밖에 나간다는 건 큰일에 해당됐습니다. 편의점에 가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식당에 가든 나간다는 것 자체에 부담이 있었죠. 그만큼 남들을 많이 신경 쓰며 살아갔다는 말이기도 했고요. 나이가 드니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단 그냥 지금 당장 내가 편한 게 중요해졌습니다. 옷을 살 때도, 미용실을 갈 때도 세련되고 멋진 것보다는 나한테 어울리되 최고로 편한 스타일을 선택하게 됩니다. 일단 편하지 않으면 선택에서 제외되는 것이죠. 편함이 도를 넘어서면 구질구질함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선까지는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주변에서는 마지막 끈을 놓아버린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일단 몸무게가 엄청나게 늘어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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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고 편안함에 익숙해지면 어쨌든 본인의 삶은 편해지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주변 사람들은 점점 불편해지곤 하죠. 남들의 불편한 시선을 한껏 무시할 정도의 개저씨력을 탑재했다면 아저씨 면죄부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에 아직까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다면 마지막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죠. 일단 아이와 함께 나가면 무적이 됩니다. 머리가 산발이든 낡아빠진 쓰레빠를 끌고 다니든 몸무게가 100kg이 넘든 상관이 없죠. 왜냐고요? 애 키우는 아빠니까요. 젊은 사람들에게 애 키우는 아빠는 남성, 여성을 떠나 다른 종류의 생물로 분류가 됩니다. 애가 있는 사람들에겐 측은지심과 격려를 받을 수 있는 안타까운 존재이고요. 저도 아이와 함께 나가면 세상에서 가장 당당한 사람이 되곤 합니다. 진정한 개저씨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아이를 낳으세요.



저는 아저씨 면죄부를 십분 활용하고 있지만 여기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냥 아저씨가 된다는 건 다수 중 하나가 된다는 뭔지 모를 씁쓸함이 묻어있거든요.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가진 색깔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도전도 많이 하는 그런 멋진 아저씨가 되고 싶은 욕심입니다. 우리 아저씨들은 겉은 낡아빠졌어도 다들 나름 신경도 쓰고, 마음속에 청춘도 살아있답니다. 그러니 아저씨들 너무 구박하지 말고 많이 응원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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