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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Feb 11. 2018

나의 존엄

당신 자신의 것과 당신을 이루는 것

  집에 오는 길. 겨울 날씨를 뚫고 운동을 한 후 수백 번은 걸었을 익숙한 집 앞의 길목으로 들어섰다. 땀이 식어 감기에 걸릴까 봐 패딩 재킷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해가 일찍 져 어두웠던 데다 모자 속 이어폰이 조금 시끄러운 거리와 나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다. 앞에서 걸어오던 안경 쓴 백인 남자 하나가 주저하면서 말을 걸었다. 힐끗 쳐다보니 그는 내 바로 앞에 서서 웅얼거리고 있었다. 멈춰서 모자를 젖히고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나는... 지금 현금으로 40유로를 가지고 있고, 집에 가면 60유로가 더 있어. 그러니까 우리... 할 수 있을까?"

"J'ai 40 euros sur moi, et 60 euros chez moi. Donc on peut faire l'amour?" 

  아무리 관용어라지만 '사랑을 한다 faire l'amour'는 표현이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방금 처음 마주친 사람에게 대뜸 가격을 흥정한 이에게 적합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 한심한 인간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입에서는 프랑스어로 욕설이 잔뜩 튀어나왔고 그는 매우 태연한 척하면서 알겠다고 돌아섰다. 어안이 벙벙해 집으로 돌아왔다. 세상에 유쾌와 불쾌밖에 없다면 명확히 불쾌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분노의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누려 마땅한 것 이상의 어떤 감정 소모도 흘리지 않겠다는 다짐이 들었다. 이 짧고, 전형적인 에피소드는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들을 남겼다. 과연 내가 제대로 언어화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생각들을. 


1. 피해자가 피해를 유발한다는 생각

  Women should avoid dressing like sluts as a precaution against sexual assault. 
성폭력을 피하려면 여자가 잡년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

  저 유명한 슬럿워크 -잡년행진-을 촉발한 토론토 경찰관의 발언이다. 나의 감상과 좀 더 복잡한 분석을 제쳐놓고 그저 맥락을 봤을 때 그 멍청한 인간은 나를 성노동자로 여겼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겠다. 혹은 내가 성노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정말로 백 유로를 주고 짐승처럼 욕구를 해소하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이었다.) 나는 단 한마디로 세계의 수많은 여자들을 제멋대로 입고 길에 나서게 한 그 경찰관을 떠올렸다. 그 한마디 이후 신랄한 반박을 셀 수도 없이 들었을 테지만, 나는 내가 입고 있던 땀에 젖은 축축한 티셔츠, 그 위에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운동복, 그걸 통째로 가리고 거의 내가 여자라는 사실도 알 수 없게 꽁꽁 싸맨 패딩 채로 순간 이동해 그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다. 내 복장의 어디가 남자를 안달 나게 하길래 그가 길거리에서 모욕적으로 여겨질 만한 말을 해도 된다고 판단하게 했을지 말해보라고 하고 싶었다. 같은 길거리에서 내가 동행인이 있었거나 남자였거나 눈에 띄는 무기를 들고 있었더라면 그의 짐승 같은 욕구를 자제하는데 도움이 됐으리라는데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왜 여자들이 길에서 마주칠지도 모르는 굶주린 남성성을 위해 거추장스러운 모든 과정을 거치고 어떤 의상이 그를 덜 자극할지 고민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가 남자였더라면 팬티 한 장만 입고 나가더라도 높은 확률로 독감보다 큰 불행은 닥치지 않았으리라는 걸 대체 언제까지 모른 체 하려는 걸까? 내가 몸을 좀 더 따뜻하게 감쌌다는 이유로 불쾌한 일을 덜 겪어마땅했다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한심한 인간은 내가 모자를 젖히기 전까지 아마 내가 아시아 여자 -프랑스어를 알아들을지 확실하지도 않은-라는 것조차 몰랐던 게 분명하다. 어두웠고, 패딩 모자에는 털이 잔뜩 달려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내가 pardon? 하고 그의 말을 되물을 때까지 멍청하고 당황한 얼굴로 망설이는 듯했다. 열 받는다고 해서 그를 힘으로 제압할 수 없을 자기보다 작은 체구에 최소한 여자로만 보이는 행인을 선택한 게 너무 명확했다. 피해자에게서 가해자의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성폭력은 가해자를 정확히 타겟하지 않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예방할 수 없다. 


2. '성노동자가 아닌 나를 성노동자 취급했다'는 함정

  집에 돌아오자마자 플랫 메이트들에게 방금 벌어진 일을 얘기했을 때 그들은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 "그 자식 어떻게 생겼어? (어떤 인종이었어?)" 딱 잘라 아주 프랑스인 이미지에 걸맞은 백인이었다고 대답하고 그가 나에게 액수를 읊어대던 순간보다도 심장이 좀 더 밑으로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백인 남자가 하면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일이고 흑인이나 아랍인이었다면 그들 특유의 못된 관습이 되는 거겠지. 성노동자 혐오를 레저로 삼는 플랫 메이트는 아주 충격받은 얼굴로 내가 심지어 드레스업하고 있지도 않았고 아주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게 하고 나갔는데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꼬집었다. '아주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여자를 '그런' 여자로 여긴 그의 태도가 아주 놀라웠던 모양이다. 나는 이 불쾌한 에피소드를 그와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성노동자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충격도 아니었고 화날 이유도 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타인에게 돈을 줄 테니 당신이 민감하게 여길 수 있을 사적인 행위를 하자고 감히 요구하는 이에게 대체 무슨 변명을 찾아줘야 한단 말인가?

  

3. 당신은 자책도 스스로를 향한 의심도 내 마음에 심을 수 없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일은 방심할 틈도 없이 자주 일상에 닥친다. 아니, 이런 일들이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일상이다. 분노는 괜찮다. 멸시나 경멸 같은 감정들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감정은 자책과 의심이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해도 괜찮은 사람인가"라는 터무니없는 만큼 강력하고 위험한 의심.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일상화된 많은 이들의 삶을 괴롭히는 것은 무책임한 사회 구성원들이 이 소수자들의 마음속에 심는 자책과 의심이다. "어쩌면 나는 정당하고 동등한 대우를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 이 비논리적인 문장이 얼마나 우리를 쉽게 무너뜨리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죄책감이나 나를 의심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 연습을 의식적으로 계속한 끝에 닥친 이 사건은 내게 이 한 줄의 위험한 생각에 맞설 확신을 주었다. 이 보잘것없는 한 줄짜리 문장은 마치 우리의 존엄성이 누군가 빼앗을 수 있고, 내가 잘못 행동하면 잃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그냥 나는 누릴 자격이 없을 때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틀렸다. 인간의 존엄성은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정확히 같은 정도로 갖게 되는 것이고 내 것이라고 임의로 갖다 버리거나 누군가 빼앗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백 유로짜리 제안으로 돈으로 되살 수 없는 나의 경멸을 산 그 남자 역시 그 역겨운 행동으로 그의 존엄성을 잃지는 않았다. 그 반응으로 내가 그에게 욕을 퍼붓고 어쩌면 처벌을 받도록 조치를 취할 수는 있지만 그를 죽여버리거나 고문을 해서는 안된다는 게 그 존엄성의 원칙이다. 같은 원칙 하에서 나는 그의 세 치 혀 때문에 나의 존엄성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면 누구도 나를 열등한 존재로 여기고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원칙을 의심할 게 아니라 반칙을 저지른 그를 탓할 일이다. 


4. 어떻게 우리는 더 나은 한 발자국을 내딛는가

  어떤 한 개인의 인간성, 인간적인 가치, 그의 인간다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가 더 나은(계급적 의미가 아닌 질적인 차원에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지표는 그가 타인을 어떻게 대하는가로 결정이 난다는 확신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 지표에 따르면 그런 류의 사람들은 참 보잘것없고 비루한 인간들인 것이다. 외국인, 아시아인, 여성으로 살면서 타인에게 못되게 구는 선택지 자체가 그렇게 쉽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이유로 얽힌 타인들을 나는 그 사람보다 훨씬 사려 깊게 대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타인을 존중하겠다는 명확한 의지와 고민을 가지고 있다. 그보다 사려 깊은 만큼 나는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보잘것없는 사람이 자책이나 스스로를 향한 의심을 심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마땅하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더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었고, 나는 있었다. 우리의 영혼은 옆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자기 자신의 정신 하나 가꿀 줄 모르는 이가 내 정신을 망가뜨리도록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이 에피소드 이후에 산발적으로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생각을 얼마만큼 잘 풀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지금도 그렇게 잘 정리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이 자책의 늪을 좀 더 쉽게 건널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란다. 설사 그 늪을 건너기가 지금은 쉽지 않더라도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짐작하는 일에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여전히 번뇌하는 이들에게 적어도 그 늪에 빠진 건 당신의 잘못도 아니고,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이 늪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시스템 혹은 개인들과 싸울 것이고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감히 거창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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