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나 숲에 갈 때면 황홀한 경이와 이름모를 불쾌감이 따라붙는다. 인류의 유산을 보는 것을 더 선호한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고민을 공유하고 나처럼 먹고 사는 일에 열광하거나 환멸을 느꼈다. 그러나 자연은 나보다 크고 광활한 존재로 감히 이해하려 들거나 공감할 수 없다. 자연은 그냥 거기에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이제껏 평소에 그렇게 고민하던 나 자신, 나의 자유, 나의 감정이 얼마나 하잘 것 없이 작은 일인가를 깨달아버리고 만다. 부질없이 작은 것에 유한한 시간을 얼마나 허망하게 쏟아부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이 깨달음의 순간이 못견디게 불쾌하다. 나는 휴양지나 산림대신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안정을 느낀다. 습관 때문이다.
2. 페르난두 페소아의 글을 읽는 일은 환희이고 절망이다. 나는 절대로 그처럼 문장을 써내지 못하리라. 가끔 그의 문장 단 한줄을 읽고도 그 한줄만큼의 의미를 담은 글을 쓰기 위해 내 인생 전체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닥친다. 동시의 그의 글을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내 내면에 잠들어있던 어떤 진리를 깨워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너무나 즐겁고, 슬프다.
3.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절망이고 또 환희이다. 우울은 페소아의 글을 좀 더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해하게 한다. 마치 그, 혹은 그에 가까운 사람이 된 것처럼.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지겨움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우울에서 빠져나오면 나는 좀 더 나로 있는 것이 편하고 능숙해지지만 그의 문장에서는 점점 더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둘 다 가질 수는 없는걸까? 페소아의 글을 다 읽고 나서도 내게 아직 남은 말해지지 않은 생각이라는 것이 남아있기를 바란다.
4. 이별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장해서 이별하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일수록 진정한 친구라는 말에 회의를 표하며 생각했다. 그가 성장했다면 또 나름 성장하고 있을 사람과 가끔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되어 헤어질 수 밖에 없다. 어떤 집단의 사람들이 항상 오랜 우정을 유지해왔다면 그들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의심해볼 수 밖에 없다.
이는 어쩌면 오래된 친구를 아주 적게 가진 나의 변명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별방법에 익숙해져서 극단적인 선언과 절차들은 필요가 없지만 자연스레 나누던 비밀이 낡아 헤지고 대화가 점점 줄어들 때, 나는 그와 더 이상 영혼을 나눌 수 없게되어 돌아서는 기분이 든다.
5. 나는 증오를 잃었다. 사람에 대한 증오를. 불현듯 나는 진정으로 누군가의 불행을 바랄 수 없고 그런 적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증오할 수 있던 좀 더 불안정하던 나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6. 프랑스는 해당 국가 출신 요리사가 직접 운영하는 외국음식 레스토랑이 많고 미식을 즐기는 문화 덕에 다양한 요리를 접하기에 가장 좋은 나라라는 걸 자랑하길 즐기던 이들이 피부색이 짙은 사람들이 많은 대도시에 가면 프랑스에 있는게 아닌 거 같다며 투덜대는 이중성. 내가 참석한 자리에서 그 대화가 이루어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암묵적 인정, 혹은 무시.
7. <불안의 책>의 우울은 나를 지배했던 아주 큰 부분을 최상의 언어로 설명한 글이지만 우울과 무기력만이 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책 말미에 불현듯 깨달았다. 내게는 아직 쓸 것이 남아있고 이는 슬프고 정열적인 희망이다.
8. 엄마에게 딸이 하나뿐이고 그게 나라서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에 우리 엄마 딸은 나밖에 없고 엄마는 나랑 비교할 다른 딸이 없다는 게 좋았다. 이 안도가 그에 대한 사랑의 실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