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양인 ‘여자’로 살아남기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무엇을 지울까? 스무 살 무렵 치열하게 사랑했던 연인의 치졸하고 추잡스러운 배신을 알게 되어 종로 인근 길거리에 엎어져 울던 날 밤은 어떨까. 전화벨을 무시하고 집에 가는 택시 안에서 옆에 지나가던 트럭이 삐끗하고 나를 순식간에 세상에서 지워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그 날밤. 만약 여러 번의 기회가 있다면 그 날도 꼭 지우고 싶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이라면, 주저없이 -상대적으로- 크고 작은 성추행을 당한 그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다.
인종주의와 결합한 여성혐오에 대해서 너무 할 말이 많아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추상적으로 떠오르는 기억을 분류하고 당시 느낀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 모든 일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기도 전에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제는 홧김에 데이팅 어플 혹은 SNS, 즉 온라인에서 여성혐오를 일삼던 남자들 과의 대화를 아무렇게나 업로드하는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다. (@jamaissortir). 정말 진정한(?) 남성 혐오자여서 남자라면 꼴도 보기 싫다면 차라리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가끔, 자주 남자를 만나고 싶다. ‘그렇게 데이고도’ 새로운 남자와 만남을 약속한다. 직접 만나는 데 드는 시간과 노력을 좀 절약하고 어느 정도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 데이팅 어플을 쓴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도 흔하지 않은 내 이름을 찾아 굳이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는 남자나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에 아무 문제의식도 없는 남자들을 막을 수가 없어서 탈퇴했다가 가입하기를 반복한다.
어제는 모처럼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화장도 잘 되어서 정말로 데이트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별 다른 무례한 질문을 하지 않는 남자가 바로 그 저녁에 데이트 신청을 하도록 유도하고 도서관 짐을 정리한 다음 학교 근처 바로 향했다. 그는 파리에서 몇 년간 공부를 했다고 프로필에 써 놨기 때문에 6개월 체류 경험으로나마 파리에 대한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가볍게 한잔 마시면서 새로운 사람이랑 대화를 하는 게 모처럼 기대됐기 때문에 그 기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웃긴 이야기처럼 프랑스에서 당한 인종차별 혹은 인종 편견에 기반한 성폭력 이야기를 꺼내는 습관이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어쩌면 항상 이런 사람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믿고 호감을 가졌다가 혐오 발언을 듣고 걷잡을 수 없이 실망하게 되는 경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은 게 짐작가는 첫번째 이유다. 이런 이야기를 은근슬쩍 늘어놓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간을 본다. 지겹다는 식으로 트람에 타면 내가 앉은 자리의 유리창을 두드리고 히히덕거리거나 바로 앞에서 빤히 쳐다보거나, 원숭이 흉내를 내는 남자아이들 얘기를 했더니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하지만 원숭이에 빗대서 비하하는 건 보통 흑인들이지 아시아인들이 아니야. 정말 너를 향한 거였다고 확신해? 네 옆에 흑인은 없었어?’ 라고 물었다. 나는 깊은 빡침을 단전 깊숙이 밀어 넣으며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 그런 순간이 닥치면 그게 너를 향한 건지 아닌지는 충분히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 "
너무 자의식과잉 같지만 나는 가끔 타인에게 뱉은 스스로의 말에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얻을 때가 있는데, 이 말도 그랬다. 왜 당사자가 아니고 당사자가 될 수도 없는 사람의 판단 같은 것을 신경 써야 할까. 상처받은 것도 나,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도 나 자신인데.
프랑스에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엮은 네이버 웹툰 베스트 도전 코너의 « 데일리 프랑스 » http://comic.naver.com/bestChallenge/list.nhn?titleId=704524&page=2# 를 보면서 어떤 기억이 물밀 듯 치고 올라와 더 이어 읽지 못하고 테라스에 나가서 담배를 피웠다. 여자 가수가 부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를 틀어 놓고 담배를 뻑뻑 피우면서 나는 꽤 오래 잘 묻어두었던 기억을 다시 끄집어냈다. 웹툰에 등장한 경선의 차가운 자취방은 아주 전형적인 프랑스 스튜디오여서 비슷하다 말다 할 것도 없었지만, 백주 대낮 자기 방 안에서 느낀 공포의 유사함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파리에서 6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하면서 나는 지독한 이별(들)을 겪었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언어에 적응하는 동안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학을 시작한지 시간이 좀 지났기 때문에 다른 길은 없어 보였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는 심정으로 1지망에 지금 다니는 학교를 넣어 놓고 거의 모든 짐을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갔었다. 프랑스에 다시는 오고 싶지 않았다. 그건 딱히 프랑스 때문은 아니었다. 그 모든 외로움과 슬픔과 우울을 견디면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할 힘이 도저히 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어가 여전히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1지망 학교에 덜컥 붙어버렸다. (정확히는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합격을 했는데, 너무 일찍 결과를 알려준 바람에 합격이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 알았다.) 큰일났다고 생각하면서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여행으로 이박 삼 일을 지냈을 뿐인 도시에 도착했다. 다행히 좋은 집주인을 찾아서 학교 앞의 건물 스튜디오를 예약해 놨는데 그 사람이 차를 끌고 데리러 와 짐을 옮기는 것과 계약서 작성도 도와줬다. 계약을 마친 후 18m2 짜리 집의 작은 침대에 누워있던 그 온전한 혼자의 감각이 어렴풋하게 남아있다. 파리에서는 대모님 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말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것이다. 그것도 말이 서툰 외국인으로 아는 사람이라곤 400키로 미터 밖에 있는 도시에서.
개강 전 불어를 조금이라도 늘려보고자 부랴부랴 등록한 어학원 수업이 시작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엄청나게 무더웠던 7월 초. 건물 1층 쓰레기 수거실에 쓰레기를 버리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남자가 함께 올라탔다. 평범하게 이웃끼리 하는 인사를 하고 그는 내게 어디서 왔느냐, 무엇을 하러 왔느냐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이 학교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할 거라고 했더니 아주 흥미롭다면서 그는 지나가듯이 내 방호수를 물었다. 얼떨결에 대답을 해주었다. 이 순간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너무 많이 애를 썼던 것 같다.
그 다다음날 저녁, 시간으로는 저녁이지만 해가 쨍쨍하던 시간, 한국에 있던 당시 남자친구와 카톡을 하며 침대에 늘어져 있었던 때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 남자였다. 좀 더 친근하고 그저 관심사가 겹치는 사람처럼 굴었던 전번과는 달리 그는 노골적으로 집적거렸다. 나는 여섯 걸음쯤 뒤에 열기를 식히려 열어놓았던 창문을 자꾸 힐끔거렸다. 정말 비이성적인 공포겠지만, 창문은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높은 천장만큼 컸고 내 자취방은 13층에 있었다. 창가에서 바닥까지는 아득하게 멀었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가 훨씬 힘이 센 그가 나를 번쩍 들어 집어 던져버릴까 봐 무서웠다.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그는 저녁은 먹었느냐고 오늘은 뭘 했느냐고 물었다. 샐러드를 먹고 가볍게 요가나 운동 같은 걸 좀 했다고 했더니 너는 지금도 이렇게 날씬한데 다이어트를 해? 하면서 내 허리를 쓱 더듬었다. 공포가 점점 차 올랐지만 무서운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미쓰 유니베씨떼라도 되고 싶은 거냐고 너 정말 예쁘다고 볼을 더듬는 그의 손을 뿌리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한 30분 정도를 복도와 창문 사이에서 머무르면서 시 덥지않은 질문을 던지고는 전화번호를 묻고 떠났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고 남자친구도 있는데 너랑 나가는게 좋을지 모르겠다고 에둘러 말해도 그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은 거라고 우겼다. 핸드폰을 정식으로 개통하기 전 임시 유심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번호를 주고 그의 연락을 무시했다.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3일쯤 뒤에 정식 핸드폰 번호를 받아서 번호를 바꿔버렸다.
이틀쯤 뒤에 그가 다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천만다행으로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틀어 놓지 않았어서 나는 살금살금 카페트 바닥을 밟고 문간으로 가 방범렌즈로 밖을 들여다봤다. 그 복도에는 움직임 센서가 달린 조명이 있었는데도 밖은 깜깜했다. 그런데 어렴풋이 누군가 앞에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가 돌아갈 때까지 집에 없는 척 하며 문에 기대 앉아 팔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싫고 무섭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던 것 같지만 집 밖에 나갈 때마다, 그와 비슷한 남자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이 기억을 지우고 싶다. 그때 느꼈던 공포와 자책을 싸그리 머릿속에서 지우면 좀 더 자유로워질 것 같다. 그렇게 자유로워지고 나면 사람을 만날 때 좀 더 거리낌 없어질 것도 같다. 그럴 수 없으니 다른 방도가 없어 나는 글을 쓴다.
프랑스어를 좀 늘리고 싶어서 학교 어학센터에서 운영하는 언어교환 사이트에 프로필을 올렸다. 여기서 아주 좋은 친구도 만났지만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는 한국인 여자로서 겪을 수 있는 불쾌한 경험도 겪어야만 했다. 그 금발 파란 눈의 남자는 만나자 마자 대뜸 내 입술 색이 예쁘다고 했다. 커피 한 잔 하자고 들어간 카페에서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한국 가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겠다며 내 옆자리로 건너와 앉고는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기선 이런 게 친밀감의 표시인가? 싶고 당황스러워서 슬쩍 엉덩이를 떼면서 피하기만 했다. 일주일쯤 뒤 그가 저녁 때쯤 만나서 언어 교환을 하자고 했다.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선뜻 밖으로 나섰는데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처럼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기숙사가 가까우니까 우산을 가져가자고 했고 별 생각없이 알겠다고 했다. 막상 그의 방에 들어가자 그는 마침 잘됐다며 자기가 좋아한다는 한국 가수 뮤직비디오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좁디 좁던 내 자취방보다도 훨씬 좁은 그의 기숙사 방의 침대에 걸쳐 앉아 어색하게 뮤직비디오를 몇 편 봤는데 그가 다시 내 허리를 감싸 안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그럴 생각도 없이 들어갔지만 여전히 아는 사람이라곤 거의 없는 도시에서 막막함을 느끼던 중이었기 때문에 어쩔 줄 몰랐다. 자꾸 ‘진도를 빼려는’ 걸 거절하면서 나는 너도 잘 모르고 어쩌고 하고 변명을 늘어놨는데 그는 프랑스에선 필링이 통하면 처음 보는 사람끼리도 이럴 수 있다면서 설득하려 들었다. 여전히 무서웠다. 그는 자기 모국어가 통하는 국적국에 있었고 거기는 프랑스 대학 기숙사였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도움을 요청하는 말도 할 줄 몰랐다. 그 이후에 찾아 그런 문장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멈추었고 나는 집에 가겠다고 했다. 3분도 안되는 우리집 건물까지 나를 바래다주고 다시 입을 맞췄는데 그러고 들어오면서 기분이 너무너무 더러웠다. 그 이후로 연락을 몇 번 씹었더니 더 연락은 오지 않았다. 길에서 한 번 마주쳤을 때도 서로 눈을 피했던 것 같다. 나중에 어학원을 같이 다닌 그 남자와 같은 기숙사에 사는 한국인 친구에게 이 얘기를 하자, 친구는 대번에 ‘OO? ‘하고 그의 이름을 댔다. 그 기숙사 아시아 여자애들한테 아주 유명한 놈이라고, 자기 아는 언니도 그 자식한테 당한 적 있다고. 같은 사이트에서 한 두 번 만나고 찝찝해 더 만나지 않은 아시안 피버 한 명의 페이스북에 들어갔더니 그 남자를 포함해 한 두 번 만나거나 연락을 했던 남자들이 한 방에 모여 일본 사람들이랑 파티를 하고 있었다. 아, 이 동네 옐로피버들은 다 여기에 있었구나. 비웃음과 분노가 동시에 몰려왔다.
이렇게 초기 2, 3개월 동안 겪은 두 에피소드가 가장 내가 뭘 모르고, 거절을 어려워하던 아시아 여자애였던 시기의 일이다. 지금도 한 방에 나랑 어떻게 하고싶어 하고 내 기분은 안중에도 없는 남자랑 같이 있다면 똑같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제 도와 달라는 말도 할 수 있고 어느 번호로 전화를 걸어야 신고를 할 수 있는지, 그런 상황을 설명하는데 어떤 단어를 쓰면 되는지도 알고 있다. 센 척 하면서 거절하기 위한 단어들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 상황이 되기 전에 잘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사람에게 쉽게 경계를 풀지 않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일들 에서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 지금 같은 때 나는 정말 여전히 푸쉬하면 넘어올 거라고 믿으면서 달라붙는 남자들을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아시아 여자들을 생각한다. 나는 한국에서도 비교적 좋고 싫은 걸 잘 얘기하는 여자였기 때문에 좀 더 요령 있게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순종적이고 거절을 못하는 아시아 여자 스테레오타입은 단순히 내가 아니기 때문에도 싫지만 정말 그런 여자가 세상에 있고, 실은 아주 많을 거란 사실 때문에 너무 참담해질 때가 있다.
설득 당해서 한 섹스는 전부 강간이라는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 남자들은 어쩌면 딴 에는 로맨틱한 프랑스 남자 클리셰를 따라하려 애썼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당황스럽고 무서운 감정이 들 때 그들의 설득을 듣고 성적 접촉을 ‘내버려뒀다’면, 그 일이 찝찝하게 기억에 남는다면 그건 불장난이나 로맨스 따위가 아니다. 이런 남자들은 그런 아시아 여자들을 이용해profiter 먹으려고 작정을 했기 때문에 그 여자가 실제로 주춤거린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않는다.
« 악어 프로젝트 les crocodiles »을 본 건 이 대학교에서의 첫해가 처참하게 망했음이 확실해 지던 때쯤 이다. 프랑스어권 유럽지역의 길거리 성폭력 에피소드를 기록한 이 만화에는 성폭력에 대응하는 가이드북 같은 코너가 들어있었는데 나는 여기 들어있는 표현들도 줄줄 외웠다. 그 만화를 보면서 프랑스 여자들도 비슷한 일을 당하는 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프랑스 여자들도 내가 3, 4년간 겪은 일들을 이야기 할 때면 눈을 휘둥그레 뜬다. 정말 그렇게 레이시스트 섹시스트가 많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고. 조금 몸에 붙는 옷을 입고 나가면 뜬금없이 다가와서 그게 아주 대단한 은혜인 것처럼 아주 예쁘다고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나 새 집을 구하러 갔더니 자기 집에서 사는 건 어떠냐 고 물어본 집주인. 그는 그러고 나서 몰래 핸드폰으로 내 몸통 사진을 찍었다. 대뜸 백 유로를 줄 테니 자자고 묻던 남자. 니하오나 칭챙총 같은 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라인 세상은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나는 정말로 어떻게 이 남자들은 자기 얼굴 사진에 이름을 떡 하니 박아 놓은 계정으로 이런 질문들을 하는지 궁금하다. 그래도 사는데 지장이 없나?
한국에서도 이런 저런 성폭력을 겪어봤지만 프랑스에서 겪는 것들은 다른 차원으로 기분이 더럽다. 그들의 눈에 외국인 같은 외모가 그런 짓을 하는 데에 단단히 한 몫 했으리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을 다른 프랑스인에게 털어놨을 때 ‘그건 네가 외국인이라서 는 아니고~’로 시작하는 설명을 듣게 된다면 백퍼센트다. 이 모든 일들을 직접 겪고 나는 아직도 살아있는데 그런 일을 한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네가 무슨 사진을 올렸느냐, 그런 사람이랑 대화를 왜 하느냐, 차단해라, 네가 어떻게 입고 있었느냐,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느냐’ 등등의 추궁과 조언을 일삼는 것까지 프랑스에서 동양인 여자로 겪는 일들의 특수성일 것이다. 그들은 마치, 심지어 가끔은 가해자들도 내가 외국 그것도 아시아 어느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이해하는 성폭력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설명을 하려 든다. 동아시아 여자들이 프랑스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찾기도 쉽지 않다. 흔히 성폭력에 관한 투쟁을 이제 막 시작된 투쟁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가끔 동아시아 여자로서 유럽에서 사는 우리들의 투쟁은 시작조차 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화가 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내일은 무언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절망할 시간이 사실 많지는 않다. 시작되지 않았다면 이 싸움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신세 한탄이 아닌 좀 더 미래지향적(?)인 글을 쓰고 싶은데 쉽지 않아 허둥지둥 긍정적인 말로 마무리를 하는 것 같아 마음에 걸린다. 그러나 너무나도 진심으로 내 자리에서 싸우는 나 자신과 각자 자기 자리에서 싸우는 모든 여성들에게 응원을 드리고 싶다. ‘그런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어’라고 본질을 흐리는 말에 화가 나서 침대 속에 숨어들어도 괜찮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방 밖으로 나가 끊임없이 불평을 하고 날카롭게 맞받아칠 수 있게 된다. 가끔 그럴 힘이 없을 땐 저 자식이 어느 날 나같이 미친개처럼 달려들어 싸울 수 있게 된 아시아 여자를 다음에 만나 된통 당하기를 바라면 된다. 서툴더라도 우리의 연대를 믿는 말로 정리하고 싶다. 나는 계속 살아남아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