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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Mar 30. 2018

사랑에 대한 단상

쉽게 읽고 어렵게 쓰는 주제

1.  나 없이도 그의 인생이 어떻게든 흘러가리라는 사실 때문에 못 견디게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던 때가 있었다. 누가 이별을 끝냈든 사랑이 끝났든 어떻게 감히 네가 나 없이도 살아가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한 이별에도 그가 일상을 이어나가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면 화가 났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런 오만 때문에 고통받았다. 그 명백하고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을 꾀했다. 나를 사랑한 너는 죽었다. 내가 사랑한 너는 죽었다. 너를 사랑한 나는 죽었다. 네가 사랑한 나는 죽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서 수많은 '너'와 '나'는 죽어 나갔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추운 겨울 새벽까지 외로움에 치를 떠는 나의 국제전화를 눈 쌓인 아파트 앞에서 받아준 사람은 매몰차게 내가 돌아선 후에도 살아나갔다. 그는 그렇게 죽어 사라지지 않았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나서 그를 경멸했던 시간을 떠나보내고 나서 우연히 그의 흔적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운 마음을 지키려고 끙끙대고 있었다. 그는 정면으로 과거를 마주하고 책임지고 더 나은 미래를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바로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사람이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잘못된 선택이나 나를 상실한 일 따위로 그의 삶은 끝나지 않았고 그는 또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경험을 하면서 살아나갔다. 그렇게 내가 '죽었다'로 맺은 모든 문장들이 마음에서 녹아 사라졌다. 아, 내가 있었던 당신들의 인생은 그렇게 나 없이도 이어져나갔겠구나. 이제껏 괴로운 줄도 모르고 나를 괴롭혀온 증오와 분노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 더 자유로워졌다.

  철들어 처음 사랑이란 것을 배웠던 시절부터 상대방의 개인사를 속속 훔쳐볼 수 있는 시대를 살아온 나에게 이별은 나 없는 그의 삶을 굳이 찾아보면서 증오하는 그런 음습한 것이었다.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고 하더니, 나 없이는 못 살 것 같더니,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잘 산단 말이야? 내 일상에서 그를 잃는 상실뿐만 아니라 그의 일상에서 내가 사라지는 상실. 또 본능처럼 사람 다 똑같지, 그도 그런 상실을 느끼리라고 은연중에 가정―기대―하고 그 없이 '잘' 사는 나를 어딘가에 전시하면서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 정말 음습하고 징그럽기 짝이 없다. 

  이 음습한 견딜 수 없음을 지겨워하던 끝에 나는 살인과 자살을 그만두기로 했다. 걔는 아직 거기 살아있고 나도 여기 살아있는데 누가 죽고 죽었다는 거야? 나는 살아있는 채로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살아남음이라는 주제가 머릿속 한편에 항상 남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다. 우리는 다른 길로 들어섰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로에게 전화를 거는 일을 그만두었다. 잠들기 전 좋은 꿈을 꾸길 빌어주는 사람 한 명이 줄었다. 더는 그의 핸드폰 번호를 외울 수 없었다. 사귀기 시작한 날짜나 서로의 생일같이 특별한 의미를 갖던 날들이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점점 그에 대해 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기억을 할 수 있는 한 그를 사랑한 적 없는 내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  그는내길쭉한손가락보다훨씬더길쭉한손가락을가졌다.나는첫눈에그손가락이좋아져서그손가락이하는가지가지일들과그손가락으로그려내는말들과그손가락이주기적으로가볍게쓸어대던그의얼굴까지좋아하게됐다.그는그길쭉한손가락으로커피를내렸고기타를튕기고그림을그렸다.그의손끝이만들어내는모든것을사랑할자신이있었다.내가바라던건단하나계속그의손가락과그손가락과관련된모든것을사랑하도록내버려두라는것.무엇이든할수있을것만같던그손가락이할줄몰랐던단하나를나는바라고야만것이다.


3.  사랑에 대해서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정확히는 골든룰로 여기는 몇 가지 사랑에 관한 문장들이 있다.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사랑은 누구도 내게 줄 수 없다. 정의가 없는 곳엔 사랑도 없다. 벨 훅스의 <올 어바웃 러브>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야말로 사랑에 관한 모든 것을 내게 말로써 새겨 넣은 책이었다. 재고 따지기로 했다.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하기로 결심했다. 나 자신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종종 당부를 했다. 아무리 지겹고 짜증이 나더라도 결국 나만은 나에게서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함께 하려면 내가 너무 만신창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가끔 나는 연애를 말했고 상대는 사랑을 말했다. 가끔 상대는 연애를 말했고 나는 사랑을 말했다. 종종 우리의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비롯되곤 했다. 


5.  인생에 사랑이 과부하가 걸렸던 기간 동안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만 싫어하고 싶어. 무언가를 싫어하는 에너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싫어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어서 그냥 싫어하는 에너지로도 어떻게든 뭔가를 해내는 법을 익혔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건 그 자체로도 너무 피곤했고 세상엔 싫어할 것 투성이었기 때문에 나는 사랑했던 사람만큼은 조금 덜 싫어해보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관계가 어색하고 덜 빛나게 됐을 때도 사랑해 마땅한 사람으로 계속 남아있어 줬다면 좀 더 아름답게 간직할 수 있었을 모든 기억들을 곱씹는다. 여러분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여러분이 좀 더 괜찮게 살아줬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멈출 수가 없네. 여러분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겠지만. 

  이런 원망도 티끌만큼 남아있지 않게 된 순간에 나는 자유로울까, 아니면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이던 날들이 있었는데, 요즘의 나는 그 사람을 원망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다. 어떤 형태로든 나를 구성하는 기억과 감정에 그가 남아있는 것조차도 소름 끼치게 싫을 때가 있다. 지나간 날들을 다시 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덜 싫어하면서 견뎌보려고 애를 쓴다. 사랑이라는 말랑말랑하고 따뜻해 보이는 개념이 날카롭고 주변을 모두 오염시키는 구체적인 감정들로 바뀌는 것을 보면 결국 사랑을 주의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별을 잘하게 됐고, 사랑은 처음부터 잘했다. 잘 사랑하는 것은 내 몇 안 되는 재주 중에 하나인데 엄한 데 쏟으면 너무 아깝기 때문에 아끼다 보니 요즘 내 인생엔 연애사가 아니라 집적댄 인간들의 방명록만 쌓이고 있다. 아낄 줄 모르고 사랑하던 날들에는 과부하가 걸리더니 아끼기 시작하니까 가뭄이 오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6.  그러니까, 연애戀愛 말이다. 국어사전에 검색해보니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이라는 결과가 첫 번째로 뜨던데, 구린 젠더 구분은 제쳐두고, 우리가 보통 연애하면 떠올리는 사랑 말이다. 말했듯이 잘 사랑하는 것은 몇 안 되는 나의 재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럴 때는 사랑이 아깝지 않다. 그러니까, 나는 연애를 겁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연애의 쓴 맛이란 쓴 맛은 다 본 이십 대 초반이 끝났고 이십 대 중반엔 온통 연애의 맹숭맹숭함이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싶은데 어쩔 수 없어서 사랑하는 게 너무 싫어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폐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한 자리에 주상복합을 남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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