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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Apr 15. 2018

세상이 내게 주제 파악을 하라고 해

비명(들).

1.

  엄마랑 다투었다. 나는 독한 여자라 화가 나서 싸울 때 우는 일은 잘 없는데, 상대가 가족이 되면 속수무책으로 눈물부터 비집고 나온다. 가끔 내가 왜 우는지 나도 가족도 모를 때가 많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유가 명확했다. 내 편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엄마라고 항상 내 편을 들 수는 없는 건데,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엄마가 아주 확실하게 내 편이면 좋겠다.


2. 

  최근에 방영하는 드라마에서 얘기를 시작했다. 주인공을 연기하는 배우가 너무 좋지만 폭력을 묘사하는 방향이 싫고, 마흔 넘은 아저씨와 스물한 살짜리 여자가 왜 서로 치유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며, 마흔 먹은 아저씨가 나와 내 또래 친구들에게 평소에 얼마나 징그러운 존재인지 아느냐고 화를 냈다. 엄마는 나는 대한민국에서 안 사는 것 같으냐고 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아저씨들을 그런 식으로 겪는 건 엄마가 아니라 스물몇 살짜리 여자들이잖아. 너는 어떻게 세상을 그렇게 젠더 문제로만 보느냐고 했다. 기가 막혔다. 


3. 

  엄마, 남자든 여자든 그냥 인간 대 인간으로 보고 싶은 건 나야. 그런데 나는 좋은 연상 남자 지인이 없어. 다 여자들과 나한테 껄떡대서 자연히 멀어지고 그 남자들은 자기들끼리 논단 말이야. 매번 매 순간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그들에게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하고 바라는 건 나 자신이야. 하다못해 같은 아시아인이어도 여자인 내가 겪는 거랑 남자인 어제 만난 그 애가 겪는 건 차원이 달라. 걔한테는 남자들이 길에서 대뜸 너 얼마짜리냐고 묻지 않는단 말이야. 아무리 내가 세상을 그렇게 보지 않으려고 해도 세상이 비웃듯이 내게 너는 아시아인이고 여자라고, 주제 파악하라고 하는데 왜 내가 그걸 가지고 화를 내면 편협하다고 하지?


4. 

  머릿속에 온갖 말들과 이야기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올라왔다. 감히 분노를 글에서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올 수 없는 여자들의 경험들. 그러나 나의 경험만으로 충분했다. 같이 놀던 그룹에서 남자 한 명이 껄떡거린다. 가끔 설레서이기도 하고 가끔은 좋은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어서이기도 하고 그리고 그런 불완전한 관계는 언제나 나를 소외시킨다. 그들도 대강은 서로가 어떻게 그 여자애에게 집적댔는지 알고 있지만 그들의 우정은 그런 걸로 변질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들과 멀리하기로 결정 내린 건 나지만, 내가 여자였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들에게 내가 항상 여자였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5.

  실제로 내가 스무 살 때 처음 사회에서 만난 마흔 넘은 아저씨는 술에 잔뜩 취해서 내게 너 같은 애는 딱 질색이라고 했다. 그렇게 막말을 퍼붓고는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 아저씨가 형성한 남자아이들의 호모 소셜에서 나는 철저하게 이상한 여자애로 찍혀서 밀려났다. 치유 같은 소리 하시네. 


6. 

  그 모든 것들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화가 나는 게 내가 이상한 거냐고 물었다. 가끔 내 입술에서 나간 말에 스스로 위로를 받고는 했는데 오늘 내가 뱉은 말은 독이 되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하루 종일 머리를 짓눌렀다. 내가 이상한 거야? 내가 너무 예민해? (네가 그런 데에 관심이 많은 건 알지만...)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게 과하다면 그게 내가 이상한 거야? 항상 마음 한 구석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의심이 입 밖으로 마구 튀어나왔다. 나라고 가볍게 데이트하러 나간 자리에서 겪은 미친놈들 연대기를 읊는 게 좋아 보일 거라고 생각하겠어? 나라고 입만 열면 모든 주제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게 즐겁겠어? 그 일들을 다시 되짚는 게 좋아서 하겠어? 말하지 않았으면 지금 내가 어떻게 됐을지 나도 모르겠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읊는 건 내가 너무 예민하고 이상한 게 아니라는 정당화를 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봐. 세상이 이렇게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이상한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내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설득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확답을 줄 수 없는 질문을 굳이 엄마에게 던져놓고 수화기 상의 긴 침묵을 같이 견디자고 든 것은 그냥 이기적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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