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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Apr 29. 2018

연애담

  한참 사랑에 실패할 나이이지만 사실 그럴싸한 연애의 기억은 별로 없다. 사랑이라고 부를 법한 관계들이 너무 오래되었다. 그 시절, 이래봤자 3,4년 전이지만 그 시절, 연인 관계의 종지부를 망설이는 나-와 내 친구들 모두의 이유는 똑같았다.

'이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아서.'

  우리는 가여울 정도로 자존감이 낮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말하는 사랑을 삶의 이유로 삼을만큼 순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람보다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있었다. 진정 고민했어야 하는 것은 이 사람보다 누군가를 더 사랑할 수 있을지였다. 이 사람이 연애사에서 가장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순진하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순간들만큼 누군가를 더이상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연애는 미지근했고 이별은 싱거웠다. 주량보다 많이 술을 마시고 토를 하고 나면 이별의 고통은 끝나 있었다.


  안다. 과거의 연인들이 내 이야기를 글로 풀어대면 나는 당장 그를 찾아가 뺨을 올려붙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면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하는 것은 불공평해보인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핑계도 확실하다. 우리 기억을 곱씹을 권리를 포기한 건 너 자신이잖아 개자식아. 완벽하게 행복했던 순간을 배신감없이 떠올릴 수 없게 만들어놓고 그들이 나를 추억하는 것은 견딜 수 없다. 내가 완벽한 연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최악의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조잡한 핑계이지만 나에겐 너무나 명확하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80년대 하이틴 스타 리버 피닉스의 영화를 보면서 첫섹스라는 건 인적 드문 숲 속에서 진지한 삶에 대한 고민을 나누면서 열정에 가득차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인적 드문 숲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였고 첫키스 상대는 나를 '지켜주기 위해' 청소년인 나와 섹스를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첫 키스는 노래방이었고 처음으로 섹스 직전까지 사랑을 나눈 곳은 디비디 방이었다. 첫 섹스는 모텔에서 했다. 우리 세대의 로맨스란 대체로 비슷할 것이다. 촌스러운 조명과 시끄러운 발라드 음악 따위가 깔리고 소주를 마시고 수상쩍은 위생주머니와 청결도가 의심스러운 침대에서 이루어진 그 모든 것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맨스로 기억할 수 있는 스스로가 존경스럽다.

  이십대 초반의 연애사에는 네온사인이 가득하고 시끄러운 가요가 울려퍼진다. 별달리 특별한 취향 때문이 아니라 자기만의 공간을 갖기에 우리는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는 점원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게 보이는 노래방이나 술집에서 숨어서 키스를 나눴다. 잠든 상대를 보면서 애정에 충만했던 순간 순간의 기억들은 개성있는 벽지와 평소엔 절대로 마신 적 없는 음료수가 들어있는 냉장고, 창문은 없으면서 종종 욕실이 유리로 뻥 뚫려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방들을 배경으로 한다.

  주로 서울. 우리집 근처 노래방과 술집이 백개씩, 모텔은 이백개쯤 있을 것 같은 유흥가가 우리의 무대였다. 종종 일산의 영화관이기도 했고 대구의 카페, 모텔거리, 클럽일 때도 있었다. 나는 네온사인이 빛나는 거리에서 연인의 손을 잡고 한껏 사랑스러워보이려고 애쓰면서 귀여운 가사의 노래를 불러줬다. 네온사인은 별 대신 빛났고 건물들은 나무들 대신 우리를 숨겨주는 체 했다.

  종로에서 이별이 시작되기도 했고 사랑이 시작되기도 했다. 북한산 한구석에서 첫키스를 하고 파리에서 마지막 키스를 하기도 했고 새벽의 아무도 없는 인사동에서 일단 뽀뽀부터 해보자고 연애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끄러운 연애 끝에 나는 누군가가 내 삶에서 특별한 연인이라고 믿는 것을 포기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쩌면 네온사인과 결코 잠들지 않는 도시의 수상쩍은 건물들 없이 사랑을 시작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파리의 세련된 아파트나 강물에 달빛이 낭만적으로 비추는 돌 다리 위에서 나눈 키스들은 편안하지만 설레지 않는다.

  그 사람을 포기한다고 나를 더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틀렸단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연애가 쉬웠을지 모르지만 스물 여섯살의 오월을 맞이할 내가 아쉬운 건 이 사람보다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없으리라고 믿었던 순진한 시절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 그렇게 간단한 걸 몰랐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영원히 애틋한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모두 새로웠던 나. 손 한 번 못 잡아본 첫사랑에게 사랑한다고 마음껏 말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매일 밤 울면서 잠들었던 나. 그런 괴로운 순간들을 애틋하게 느끼게 할 만큼 시간은 위험하고 그만큼 어느 시점 이후의 내 연애사는 초라하다.

  나는 더이상 나 싫다는 상대에게 매달리지 않고 나 좋다고 매달리는 상대에게 안쓰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런 일들에 능숙해지는 것이 얻는 건지 잃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남들에겐 명확한 이별의 신호들을 무시할 만큼 눈이 멀어서 사랑타령을 하지 못하는 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도 모르겠다. 보스몹을 연속으로 깨고나서 시시해진 게임처럼 연애를 한다.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마지막으로 생각한 사람은 누구였더라? 정말 그렇게 믿긴 했나?

  이별 후의 길을 열심히 걷고 보니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다. 뚜렷하게 남은 것들은 아주 단편적이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빨개지던 눈동자, 잠깐 여기 앉았다 가자며 이끈 손을 붙잡고 앉았던 바닷가의 축축한 땅. 매일매일 눈물로 축축하게 젖었던 베개커버, 놀래켜주려고 몰래 기차나 지하철을 타고 두근거리면서 쪽잠을 붙일 때 들렸던 철도 소리. 부모님에게 거짓말을 하고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여행을 떠나던 날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따위의 것들. 업어달라고 졸라서 키가 훌쩍 커져 걸었던 길들과 모텔에 들어갈 때마다 느꼈던 어색함, 성인의 날 대구에서 서울까지 가져온 장미꽃. 처음으로 싸우고 나눈 통화나 더 기억에 남는 선물을 해주겠다며 이제는 없어진 팬시점에서 서로를 경계하면서 선물을 고르던 날들.

  언젠가 다시 이런 기억들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내 고민에 주저없이 그렇다고 답해줄 수 있는 날도 올까? 몇년 전의 나에게 그 사람보다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고 대답해줄 수 있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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