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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Apr 26. 2018

의 정신과 몸

  나에 대해 쓰는 것은 지겹다. 초고를 대충이나마 다듬을 때마다 의식적으로 '나는'이라는 주어를 지운다. 그 문장에서 '내'가 없어도 말이 된다면 말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나에 대해서 써야겠다. 


  나는 우울증과 ADD 환자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진단을 받았다. 무언가를 해야할 때 그 일을 미루는 단순한 게으름부터 물건을 자주 떨어뜨리고 여기저기 부딪혀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는 멍들이 온 몸에 있다. 대화를 나누다가 느닷없이 딴 생각에 빠져 방금 한 말을 다시 물어야 하는 순간들이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이루고 있다. 이 모든 증상들로 이루어진 사람이 지금의 나여서 ADD 혹은 우울증 없는 나는 지금쯤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하고싶은 것과 해야하는 것이 대부분 일치하는 편이어서 오히려 더 힘들었다. 해야할 뿐더러 하고 싶은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건 더럽게 어렵다. 

  글을 쓸 때 항상 긍정적이고 기운을 북돋는 방향으로 마무리 하려고 노력한다. 자기 혐오를 멈추기 시작한 시점부터이다. 정확한 시점도 기억이 난다. 2015년의 초반쯤. 아무리 내가 스스로를 싫어해도 나를 떠날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부터이다. 모자르고 부족한 나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살아야 하는 건 결국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좀 덜 미워하기로 결심했다. 아주 작은 일, 설거지거리를 싱크대에 갖다놓는 일, 침대에서 일어나 잠옷이 아닌 옷으로 갈아입는 일부터 훌륭하다고 과하게 스스로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걸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ADD 약을 먹으면 모든 일을 시작하고 이어하는 게 덜 어려워진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생각이 들면 잠들기도 쉽고 자책하는 수많은 레퍼토리를 덜어낼 수 있다. 

  피곤한 점은 이런 점이 게으른 천성이나 핑계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와 타인들에게 설득해야 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지금 정신과 주치의도 성인에게 리탈린을 처방한 적은 없다면서 약을 처방해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번 주에 나는 유리병과 접시를 총 3개 깨먹었다. 떨어뜨린 다른 물건들을 주우면서 머리를 부딪힌 횟수나 다른 부위를 부딪힌 횟수는 셀 수도 없다. 핸드폰 액정 보호필름에는 벌써 금이 여럿 가있다. 그게 다 언제 생겼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주치의에게 리탈린 처방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어려운 다른 이유가 있다. 우울증과 관련된 호르몬이 잘 작동을 할 때 리탈린은 그저 해야할 일들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부정적인 생각과 비이성적인 우울사고가 반복될 때는 증상을 악화시키기만 한다. 작년에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 그 부작용을 겪은 뒤로 스스로 리탈린을 주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주치의가 준 약을 시험 때만 복용하는 식으로 버텨왔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 또다시 접시를 말도 안되게 깨먹고 나서 휴가중인 정신과 주치의 대신 일반 주치의를 찾아가 처방전을 써달라고 했다. 절차가 복잡했고, 이미 자책사고가 시작됐기 때문에 좀 힘들었지만 이건 그냥 끝나는 것 뿐이고 여차하면 비상약을 먹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었을 일들에 대해 떠올리는 것은 지겹다 못해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래도 나를 싫어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를 싫어하는 일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테니까.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직업으로 삼고 싶은 생각은 해본 적 없지만 5년 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다양한 운동을 즐겁게 하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먹는 것도 좋아하기 때문에 딱히 식단을 조절하지는 않느다. 전문 운동인도 아닌데 더 나은 퍼포먼스를 위해서 식단을 조절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라고 생각은 한다. 하지만 봄이 되면서 살이 좀 붙었거나 체중이 올라가면 신경이 쓰인다. 키가 160이 넘는 여자들이 40키로 대 몸무게를 유지하는 건 대부분 건강을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몸의 규범에 반발하지만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몸의 규정에서 벗어난다고 느끼면 위기의식을 갖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유산소 운동은 지루해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 나는 유산소 운동을 꼬박꼬박 한다. 

  총 길이 166센티미터의 내 몸은 53키로가 떨어지면 근육량이나 체지방과 관계없이 쉽게 피로해지고 뼈마디가 아프고 쉽게 우울해진다. 그래서 53키로 미만의 마른 몸매는 포기했다. 그때 찍은 소위 '여리여리한' 사진을 보면 여전히 예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그 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그 몸을 예쁘다고 여기는 것이 역겹다. 좀 더 근육과 지방이 붙으면 건강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지만 누군가 나를 통통하다고 생각할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내 몸과 마음은 항상 54kg과 60kg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비현실적인 몸을 이상적인 것처럼 여기게 하는 사회 규범에 보탬이 되고 싶지 않지만 그 규범에 부합하는 몸을 자랑하고 유지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욕망 때문에 항상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이런 모든 고민과 실행에 옮기는 에너지를 다른 데에 쓸 수 있다면 좀 더 많은 생산적인 일들, 죄책감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몹시 괴롭다. 

  식스팩 복근을 가지고 있어도 배부르게 밥을 먹으면 배가 나온다. 당연한 사실이다. 잘 먹은 사람이라면 배가 납작하지 않다. 그런데 왜 우리는 납작한 배(만)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그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목표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나 혼자서 여기에 저항하는 건 쉽지 않다. 그렇지만 오늘은 인스타그램에 있는 마르고 탄탄한 몸을 지향하며 쓴 포스팅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글들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그냥 몸매가 드러나는 사진을 전부 지워야할지(그러지는 않았다), 다이어트나 근육, 운동 동기부여 같은 것을 언급한 글들을 지울지 고민을 했다. 굉장히 자주 몸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서 좀 놀랐다. 매일 입는 옷들을 기록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던 글들까지 지워야할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확실하게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에 요구하는 몸을 기꺼이 전시하고 자랑하고 싶었거나 그를 지향하고 있음을 언급한 글들을 대강 지워도 마흔개에 가까웠다. 

  최소한 나의 현재 지향점은 건강을 해칠 정도의 마른 몸이 되기는 아니고, 근육질에 힘센 여자가 되기에 가깝지만 여전히 속옷서랍에는 줄자가 들어있다. 아직도 내 허리나 허벅지 둘레를 재면서 센티미터가 늘어나면 괴롭다. 다른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데에 더이상 기여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여기까지이다. 좀 더 자유로운 이유로 운동을 하러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내 SNS는 외모지상주의 투성이다. 자책왕이자 나르시스트인 나는 대부분 스스로가 충분히 아릅답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다고 열망한다. 후자의 욕망의 메커니즘을 정말로 견딜 수 없어질 때 셀피 포스팅들도 다 지울 수 있을까? 지우는 행위자체는 쉽지만 욕망을 지우기가 어렵다. 어떤 몸을 가지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 역시 그렇다. 연애의 정글에서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지만 비현실적이고 나의 에너지와 시간을 빼앗는 욕망을 유지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답을 찾을 수 있는 고민을 하고 있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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