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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Jun 30. 2018

여름 새벽 밤

독창적인 생각은 불가능하다

1.

  '동물학 박물관'이라는 곳에 갔었다. 지구 곳곳의 동물들 박제를 전시한 곳이었다. 박물관의 축제 날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아주 많았음에도 방부 처리된 동물들의 시체가 수십 배는 더 많아 보였다. 더 이상 움직이지도 썩지도 않는 새와 곤충들과 포유동물들과 파충류와... 그 시체들 사이로 걸으며 어쩐지 숨이 막혔다. 이 동물들은 어떤 경위로 이렇게 굳어 자신의 고향도 아닌 어느 다른 대륙 지역에 영원히 전시되었을까? 개중에는 멸종한 동물들의 박제와 곧 멸종될 동물들의 박제도 있었다. 어쩌면 인류가 박제된 그 동물들의 시체보다도 일찍 소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들은 누구에게 보이게 될까. 초점 없는 눈동자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동물들의 시체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설명에 따르면 그 박물관의 소장품 대부분은 어떤 소장가의 수집품을 기증받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죽은 동물들의 육체가 썩지 않게 처리한 것을 모으는 취미라니, 악취미라고 생각했다. 

  생기를 잃은 자연의 흔적들 사이를 걸으며 사라져 간 그들의 우주를 상상한다. 그들이 보고 느끼고 먹고 닿았을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혈관 속이나 피부 조직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을까. 무슨무슨 지빠귀 하는 이름이 남아있는 그들의 육체에선 시취조차 나지 않을 테다. 나라는 사람을 정의할 때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들, 생각해온 것들, 몸으로 하는 일들, 먹는 것과 기억과 경험들의 총체로서의 나를 떠올리고 설명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숨을 멈추고 썩지 않도록 방부처리가 된다면 그 육체를 계속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를 나로 있게 하는 사고의 힘을 잃은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일까?

  지금 그 박물관으로부터 팔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나는 여전히 나인가? 그 팔천 킬로미터를 가로지르는 상공에서 그 박물관의 답답한 공기와 유리 전시관을 떠올리며 남긴 메모를 지금 옮겨 적었다. 박제된 동물들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것조차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겠지.


2.

  한밤중과 새벽이 좋다. 세상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외출을 하지도 못해 애매하게 발이 묶여 딱히 활동이랄 것도 할 게 없는 시간. 나만 뒤쳐져 있다는 느낌에서 해방될 수 있는 시간. 마치 장시간 비행을 하는 것만 같다. 비행기에서는 무엇을 생산해내거나 하기를 기대받지 않는다. 적당히 누워서 얌전히 있으면 그만이다. 무언가를 해서 경쟁에 걸맞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시간을 메꾸기 위한 소일거리를 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시간. 그 조용하면서 금방 깨질 듯한 고요함과 서늘해지는 공기와 어둑어둑한 하늘까지, 매일매일 밤과 새벽이 존재한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3.

  잘 차려입고 잔뜩 힘주어 화장을 하고 미술관을 걷는 걸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언젠가의 국어 선생님이 자기 이상형은 함께 박물관에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 때부터였나? 예술의 도시라고 불리는 도시에 잠시 정착해 수시로 세계적인 미술품들을 볼 수 있게 된 다음부터? 왜 미술관에 갈 때 잔뜩 드레스업하고 싶은지 생각도 해본 일이 없고 왜 그런지 자문한 적도 없었다. 탈 꾸밈 노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요즘에까지. 미술관에 가기로 결정하고 원피스로 갈아입고 알레르기로 뒤집힌 피부에 애써 화장품을 얹으면서, 뒷목에 기분 나쁘게 감기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해가며 미술관을 걸으면서, 그런 나의 욕망이 어디에서 온 건지 궁금해졌다.

  오르셰 미술관은 아마 미술관 중에서도 여성 피사체가 많은 미술관일 것이다. 그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드가, 로트렉, 르누아르의 작품들 속 여성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이 복잡해졌다. 마네의 그림에는 소풍 중인 정장의 남성들 사이에 나체의 여성이 관객을 웃으며 바라보는 그림이 있었다. (<풀밭에서의 식사>). <올랭피아>와 마찬가지로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는 나체의 여성에 당대의 반응은 놀람과 증오였다고 한다. 그러나 왜 이 여자는 혼자 벗고 있는가? 왜 나는 불편하고 가슴선을 강조하는 원피스를 입고 외출을 하고 싶은가? 저명한 화가들이 그 여자들을 객체로 삼은 과정과 내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지 결정하는 과정의 논리는 얼마만큼 다른가? 화폭 안의 그림과 화가 중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보이기 위해 보러 가는 나. 나는 나 하나를 이해하는 일도 이렇게 어려워한다. 


4.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고 했던가. 아주 오랜만에 잠시 머물렀던 다양성의 도시, 파리에서 잠시 지내면서 절절하게 그 문장의 의미를 음미했다. 파리의 공기는 자유로웠다. 사람들은 좀 더 바빠 보였고 냉정했으며 덜 웃었지만 파리에서 인종 다양성은 공기 속에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서로의 피부색을 애써 의식하지 않았다. 비 백인이 이미 다수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여기에도 인종차별이 존재하겠지만 그저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색해하거나 경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인종 다양성과 그 다양성을 당연시하는 '공기'는 한층 더 호흡을 쉽게 해주었다. 피부색과 외모 때문에 어떤 행동을 기대하거나 기대받지 않는 자유로운 공기는 너무나도 중요하다. 도시의 공기는 과연 자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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