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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May 26. 2018

지껄이기

26.05.2018

(성급한 일반화를 포함하는 글입니다.)

1

  세상엔 좋아하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기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단연코 후자다. 나는 싫어하는 것을 엄청나게 잘한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싫어해 마땅한 이유를 낱낱이 알고 있다. 생각이 많은 편일 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건 느낌이고 싫어하는 건 생각이다. 불쾌하거나 기분 나쁜 감정이 들고 나면 그게 적절한지 따져보고 그만 싫어해야 할지 계속 싫어해도 될지 가늠해봐야 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건 비교적 간단하다. 따로 짚어보지 않고 넘어갈 때가 많다. 즉 나는 신중하게 싫어하는 사람이다. 신중하게 싫어하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인다. 어쩌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결국 나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에 대해 가장 신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나를 좋아했다면 내가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남자들은 그렇게 자존감이 높고 생각이 없는 걸까? (성급한 일반화를 포함하는 글입니다.)


2

  지난번, 정확히는 지난주까지 옆 방에 살던 여자를 아주 싫어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신경질적이고 높은 톤이었고 말투에는 우아함이 그냥 없는 수준이 아니라 0에서 뺄셈을 한 수준으로 우아함이 없고 옆에 있기만 해도 거북해졌다. 로렌 지방의 시골에서 온 그 애는 1개 국어밖에 제대로 못 하면서 내가 프랑스어 단어를 헷갈리면 비웃듯이 말을 했고 심지어 내게 두부를 어떻게 먹는지 가르치려 들었다! 시끄럽고 귀에 거슬리는 프랑스 힙합을 들었고 모든 영화와 드라마를 프랑스어 더빙으로 봤다. 수상하게 생긴 인스턴트식품을 먹었고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 집안꼴이 더럽다고 짜증을 냈다. 높은 톤의 괴상한 어조의 목소리로 끊임없이 혼잣말을 했고 도대체가 그렇게 경솔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솔직히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자기 가족의 병력이나 자기 집의 고양이와 그 고양이가 사냥해온 토끼 얘기를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나는 명실상부하게 이 집에서 그 애를 가장 덜 상대한 사람이고 그 애를 가장 싫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애를 가장 싫어했기 때문에 그의 경거망동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날씨가 풀리면서 우리 집 1층에 사는 마담은 담배를 피울 때마다 창 밖으로 상체를 거의 전부 내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감시하듯이 노려본다. 너무 뚫어져라, 그것도 경계하며 노려보기 때문에(대체 겨울엔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내가 아파트 앞을 지날 때마다 나와 있었는데 말이다.) 조금 불편한 감정이 드는데 그럴 때 그 시끄러운 옆방 여자애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거나 혼잣말을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방에 틀어박혀서 무시하려고 노력하면서도 결국 그의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기억해버리는 내가 떠오른다. 1층 마담에겐 온 세상 사람들이 시끄럽고 그걸 무시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겨워서 때려치운 건지도 모른다. 나는 그 사람보다 젊고 좀 더 젠 체 하고 싶어 하고 그럴 여력도 있기 때문에 싫은 사람을 무시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결국 싫은 사람을 엄청나게 관찰해버린다. 


3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주 친했던 친구 한 명이 모든 것을 너무 쉽고 많이 싫어하는 내가 스스로에 진절머리를 내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말을 해줬던 것 같다. 그리고 그에게 했던 답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하지만 싫어하는 에너지로는 많은 걸 할 수가 없어. 그냥 자기 파괴적으로 에너지를 소비할 뿐이야." 싫어하는 데에 에너지를 쓰지 않는 건 실패했고 싫어하는 에너지로도 무언가를 해보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쓴다. 이 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언젠가 정말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을 때 글을 쓰는 게 어렵지 않도록 일단 지껄이고 보는 게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싫어하는 에너지로 많은 걸 할 수 없다는 것은 후의 몇 년 동안의 경험으로도 계속 사실임이 밝혀졌기 때문에 나는 좋아하는 데에도 에너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좋아하는 걸 고르는 것도 생각보다 에너지가 든다. 일단 운동. 운동 좋다. 어떻게 좋아해야 할까?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하는 비합리적인 미적 판타지가 싫기 때문에 여리여리하고 가느다란 몸을 추구하는 운동은 장기적으로 좋지 않다. 그러니까 그런 운동 대신 체력과 근력을 기르는 운동을 좋아하기로 맘먹는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여전히 습관처럼 어느 부위의 지방을 집중적으로 태워준다는 동작의 동영상을 클릭한다. 

  부드러운 갈색 고수머리에 눈이 회색에 가까운 초록색인 남자애를 좋아해 볼까 고민도 해봤다. 이 경우엔 싫어함이 좋아함의 발목을 잡은 경우다. 사람을, 특히 남자를 좋아하는 데엔 변수와 위험이 너무 많다. 일단 그는 일정 기한이 지나면 손을 잡거나 가슴과 어깨 사이에 비스듬히 누워 잘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가야 했다. 그와 나눈 대화는 대체로 흥미롭고 몹시 즐거웠지만 언제고 그는 개자식이 될 수도 있었다. 나와 흥미롭고 즐거운 대화를 나눈 많은 다른 남자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개자식이라고 판명이 나면 나는 어쩔 도리 없이 내가 낭비한 시간과 마음과 에너지와 스스로 때문에 그것들과 나 자신을 싫어해야 할 것이다. 그런 종류의 싫어함은 품이 아주 많이 든다. 그런 종류의 싫어함이야 말로 파괴적이다. 나는 불안정한 우울증 환자고 평소의 싫어함에 쏟는 에너지와 우울감으로도 한계치를 걷고 있으니 더 이상의 모험은 무리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좋아함의 모험을 하나 포기하기도 했다. 


4

  어쨌든 오늘은 좋아하는 걸 하기로 한 날이었다. 학기가 끝나고 나는 한도 끝도 없이 나태하게 마음대로 리듬을 정해 살고 있었고 가벼운 과업 리스트는 쉽게 쉽게 해치우면서 아무 책이나 집어 읽는 사치스러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집에서 가까운 현대 미술관에서는 건립 20주년을 맞이해서 재미있어 보이는 특별 전시가 열렸다. 작년 퀴어 퍼레이드 때 입었던 브라렛과 짧은 핫팬츠를 입었다. 루키즘을 배척하는 나르시시스트로서 모순된 존재인 나는 그 옷들이 완벽하게 어울리는 스스로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결국 핫팬츠 대신 무릎을 덮는 까만색 플레어스커트로 갈아입었다. 첫 번째로는, 현대미술관 근처에서 하루 종일 스케이트 보드를 타면서 지나가는 여자들한테 헛소리를 지껄이는 게 하루 일과인 녀석들한테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았다. 기술적으로 걔네한테 여지를 주지 않으려면 아예 나가지 않아야 하거나 그 자식들이 밖에 나오지 않도록 어디 가둬버리는 게 맞았겠지만 어쨌든 마음에 걸렸다. 두 번째로는 꽉 달라붙는 핫팬츠가 그냥 너무 불편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유니클로 남성용 드로즈를 입어본 뒤로 '여성용'(통기성이 나쁜 소재를 골라 레이스를 달고 엉덩이 골에 낄 정도로 뒷면을 좁게 만든 다음 사타구니에 고무줄을 끼워 고정시키는) 팬티를 서랍장의 '내면의 아름다움'에 양보한 나다. 애초에 딱 붙는 브라렛도 불편하고 7센티짜리 샌들도 불편하지만 나는 루키즘을 배척하는... (생략) 으로서의 기쁨과 신체의 자유 사이에서 대충 균형을 잡았다. 

  화장을 하고 걸음걸이에 신경 쓰며 현대 미술관에 갔다. 금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없고 한적해서 좋았다. 사실 전시 내용이 매번 훌륭하고 유명한 유럽 작가들의 작품이 잔뜩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미술관은 붐비는 일이 좀처럼 잘 없다. 루브르나 오르셰같은 프랑스의 유명한 박물관, 미술관은 소장품이 너무 많아서 간격도 없이 빽빽하게 작품들이 걸려있는 반면 이 미술관에는 피카소의 자리와 시냑의 자리와 모네의 자리가 각각 분명하게 분리돼있다. 미술을 좀 더 좋아하고 아는 게 많았다면 더 좋아해야 마땅했을 전시관이다. 상시 전시실 입구에는 원래 로댕의 조각이 놓여 있었고 시각 정보로만 판단한 조각의 성별은 남성이었는데, 이번에 여성으로 보이는 조각으로 바뀌었다. 모자이크로 여러 가지 선명한 색이 겹쳐진 조각이었는데 여성의 신체를 강조한 모양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지금 찾아낸 이유다.) 신경 써서 보지 않고 빠르게 지나쳐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특히 변화가 많았던 입구 초반의 풍경화 코너를 둘러보고 있는데 복도 틈 사이로 비추는 그 조각상을 인기척이라고 느끼고 놀라서 몇 번인가 돌아봤다. 보통 사람의 몸보다 덩치가 크고, 색깔도 달랐는데도 이상하게 흠칫흠칫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조각상이 누구의 작품인지는 모르지만 색깔과 느낌과 인상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저런 존재감을 가지는 작품이었구나,라고 핸드폰에 메모를 해두었다. 사실 그 문장 가지고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존재감이 있는 작품이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5

  꿈에서 나는 끊임없이 고등학생이다. 나름의 고통과 절망도 겪었지만 큰 이벤트도 성과도 없이 흘러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꿈에서 끝도 없이 고등학교로 돌아간다. 심지어 애매하게 삼분의 일쯤 일을 하는 이성이 여름에 한국에 돌아간 나를 졸업한 여고에서 다시 수능 공부를 하는 늦깎이 고등학생으로 만들어놓는다. 그렇게 쫓기듯이 수능 공부를 하다가 갑자기, 아 나 프랑스 가려면 멀었는데, 그럼 수능 보러 다시 겨울에 한국에 와야 하나? 한국에서 대학을 가면 프랑스 학교는 어떡하지? 이렇게 한심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깬다. 그 하나도 말이 되지 않는 고민을 하면서 무의식의 휴식시간 내내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내가 찾아낸 말이 되는 설명은 이렇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우울증 환자로서 나는 인생의 어느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리면 이미 엿같아서 손댈 데를 모르겠는 인생을 뜯어고치고 아주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구체적으로 오랫동안 해왔다. 물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회피 기제이자 우울 사고를 부추긴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는 의식적으로 멈추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그래서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가장 돌아가고 싶어 했던 순간인 중,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는 건 어떻게 정리가 됐는데 무의식은 아직 그 습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학생 시절로 돌아가서 좀 더 쿨하고 똑똑한 애가 되거나 고등학교로 돌아가서 우등생이 되면 지금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망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덜 잠든 이성이 개입을 해서 잠깐, 너는 이미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지금 여기선 한국에 있지만 너는 주로 프랑스에서 살잖아!라고 외치면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서 동시에 망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꽤 금방 이뤄질 것 같지만 이성이 작동을 하기 시작해도 꿈에서 깨기까지 정말 말 같지도 않은 고민을 하면서 시간이 걸린다. 피곤하기 이를 데 없다.


6

  수면 시작과 종료에 어려움을 겪고 무기력증을 달고 사는 나로서는 하루하루 이루는 진보라는 게 보잘것없다. 우울증 환자의 시각으로 보면 처참한 수준이다. 그래서 읽고 적는다. 하루하루 무얼 했는지 알 수 없고 쓰레기처럼 똑같이 무기력한 하루를 보낸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내가 걸어온 길에 아무것도 없는 암흑인 것 같을 때, 그렇게 느끼지 않으려고 한 줄이라도 그 하루를 특별하게 느끼게 할 만한 글을 적고, 책을 깔아 둔다. 이 날 이때에는 이 책을 읽었고 그 전날에는 일기에 이렇게 썼구나,라고 다음 주와 다음 달과 내년의 내가 생각할 수 있도록. 책을 밟고 글로 엮은 줄에 매달려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 그래. 나는 이 얘기를 하려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부터 오만 가지 잡소리를 늘어놓았다. 적어도 요즘의 나는 삶을 끊임없이 읽고 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게 몹시 만족스럽다. (휴! 좋아하는 것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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