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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Sep 01.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5-

공통주제 : 체육대회

  “체육대회의 꽃은 계주지!”

5반의 분위기는 험악했으나 담임은 아랑곳 않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ㄱ 중학교 체육 선생의 기대주 선을 의식하고 한 말이었다. 선은 달리기 천재라고 불리었는데, 본인은 그냥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 조용히 사는 것이 목표라고 했으나 교무실의 압박을 못 이겨 꼬박꼬박 육상 훈련을 받고 있기는 했다. 선의 주종목은 50미터 단거리 육상으로, 운동장 반 바퀴를 도는 계주와 조금 다르긴 했으나, 어쨌든 이 학교에서 가장 빠르기는 할 것이었다. 문제는 계주에는 당연히 선만 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쌤, 연이 다친 거 안 보이세요?”

연은 5반의 반장이다. 연은 체육을 싫어했다. 똑 부러지고 야무졌지만 남의 앞에 서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연은 반장 필수 참가였던 장애물 달리기에서 크게 넘어져서 무릎이 전부 까지고 말았던 것이다. 남자애들은 눈치도 없이 연이 넘어지던 자세를 계속 따라 하며 놀려댔고, 그런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솔이 화를 내다가 정말로 남자아이들 무리 몇과 대판 싸움을 벌인 뒤였다. 그 과정에서 다시 시선이 연에게 몰려 연은 넘어진 직후 그치고 용케 참던 눈물샘을 다시 터뜨리고 말았다. 누구도 솔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남자애들의 시시덕거림이야 반 아이들 모두 학을 떼던 참이었으니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연이 남의 주목을 끄는 것도 싫어하고, 2학기 반장도 성적이 좋고 책임감이 강한 연을 담임이 거의 강제로 시킨 일이라는 걸 아는 솔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연이 너, 특목고 갈 건데 임원 기록 하나는 있어야지!’

연은 그런 말들에 거의 파랗게 질리듯 했으나 담임이 교실 한복판에서 더 자기를 호명하는 걸 견딜 수 없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후보로 자원했다. 그러나 체육대회에서 연이 가장 싫어할 종목인 장애물 경주에 필수 참가해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더 용기 내서 거절했으리라. 아무튼 늦은 후회였다. 솔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여자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부반장이 되었다. 남학생들 학부모들이 왜 5반은 전부 여학생이 반장 부반장을 맡느냐고 따졌다는 이야기가 들렸지만 5반 남학생들은 자기들이 직접 무언가 떠맡아 일을 하는 것보다는 앞에서 일하는 여자아이들을 놀리는 데에 도가 튼 집단이었다. 정작 임원을 하고 싶어 하는 남학생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은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솔은 평범하게 팔씨름 대표로 나가게 되었는데, 체육대회 성적 자체 보다도 여자애들이 전부 임원인 바람에 성적이 나쁘다고 낄낄거리는 남학생들에게 역시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게다가 장애물 경주 후에 연을 감싸다가 정말로 남자애들과 험악하게 언성을 높인 바람에 몇몇 남자애들은 빈정거림을 넘어서 괜히 열을 내기까지 했다. 솔은 평소처럼 무시하고 말았지만 거기에 연이까지 다시 호명되는 바람에 더욱 미안해하던 참이었다.

  “에이, 그럼 선이 한 번 더 뛰면 되지.”

  “1반이 가만 안 있을걸요.”

1반은 5반과 꼴찌를 겨루는 반이었다. 5반 담임인 최는 조금 눈치가 없는 정도였지만 1반 담임 한은 괜히 아이들을 들볶으며 자기 계발서 적인 훈화를 종례 시간에 한 시간씩 늘어놓는 종류의 선생이었다. 반 단합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지만 어쨌든 5반의 육상 천재 선이 두 번 출전을 해 오늘 종례 시간이 더 길어진다면 1반이 단합해 문제 제기를 하리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1반이 왜?”

그리고 최는 평소처럼 눈치가 없었다. 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2학년은 최악이었다. 남학생들은 어째서인지 모르나 이런 일에 목숨 걸고 열심히 하는 게 좀 없어 보인다고 여기는 듯했다. 닭싸움 같은 단체전에서 저들도 모르게 열을 내다가도 특히 몰입하는 아이가 있으면 득달같이 놀려먹고는 했다. 당연히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연이나 솔처럼 눈에 띄는 ‘구멍’이 생기면 괜히 여자애들은 이래서 안된다는 쌍팔년도 적 소리까지 늘어놓고는 했다. 반이 꼴찌를 하는 게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여학생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계주에서 점수가 더 깎이면 선은 몰라도 연과 솔이 더 무슨 말을 들을지 몰랐다. 선은 2학년 중에서 키도 제일 크고, 조용한 성격에 육상 천재라는 별명까지 붙어 왠지 남자애들이 함부로 놀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점수를 깎아먹고 한 차례 놀림까지 당한 연과 솔에 대한 놀림은 체육대회가 끝나고도 이어질지 몰랐다. 여기서 더 점수가 깎이면 안 된다. 그 애꿎은 책임이 갑자기 선의 어깨에 놓인 것이다. 선은 센스 좋고 배려심 있는 솔이나 체육 선생에게 이끌려 훈련을 하고 오면 노트를 살뜰히 챙겨주던 연에게 압박을 더해주고 싶지 않았다. 꼴찌 경쟁자인 1 반도 꼴찌만은 면하려 열심히 할 것이다. 남자애들은 작정하고 설렁설렁할 테니 선이 힘내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생각을 눈치챈 솔이가 선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너무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아아, 시간이 길어져서 각 반에서 계주는 스무 명씩만 나오겠습니다.”]

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침 체육대회는 슬렁슬렁 노는 건 줄 알았는데 평소보다 늦게 끝난다며 볼멘소리가 나오던 참이었다. 운동장 여기저기서 작게 환호성이 들렸다. 남학생들이 경쟁하듯 그럼 난 안 해! 하고 소리쳤지만 곧이어 남학생 열 명, 여학생 열 명은 나와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이선이 남자 세명 몫은 할 것 같은데-!”

꽤 용감한 남학생 하나가 그런 말을 하려고 했지만 주변 여자아이들이 홱 노려보자 꾹 입을 다물었다. 선은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아무튼 다친 연은 빠질 수 있게 되었다. 대강 인원이 채워지고 반씩 나누어서 동그란 코스의 앞 뒤로 줄을 서게 되었다. 발이 꽤 빠른 편인 솔도 함께 나가게 되었다. 선은 운동화 끈을 다시 한번 당겨 묶고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주저하다가 아직도 훌쩍 거리는 연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걱정하지 마.”

눈물이 그렁그렁한 연이 깜짝 놀라 바라봐 조금 뻘쭘해진 선이 얼른 솔을 따라갔다. 선은 마지막 주자로 뛸 것이다.


  열 명 남짓 옹기종기 모인 각 반의 아이들은 그래도 마지막 경기라 그런지, 참가자가 많아 그런지 그럭저럭 응원 열기를 이어 나갔다. 특히 꼴등 만은 하기 싫었던 1반이 마지막 다섯 주자를 전부 남학생들로 몰아넣자 여기저기서 야유가 들렸다. 탕, 출발 신호가 울려 퍼졌다. 5반의 첫 번째 주자는 솔이었다. 솔은 이것저것 신경 쓰이는 것들을 만회하려 열심히 뛰었다. 5반은 중간까지 3등 정도를 유지했다.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열네 번째 주자가 6반의 주자와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순식간에 8등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순서는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쉽사리 따라잡기 힘든 형편이 되었다. 선을 응원하러 나온 담임도 별로 기대하기 힘들겠다는 얼굴을 했다.

  선에게 바통이 넘어왔을 때 5반은 7번째로 출발하게 되었다. 마지막 주자는 한 바퀴를 전부 돌아야 한다. 1등으로 나선 3반 주자는 벌써 3분의 1바퀴쯤 앞서 뛴 상태였다. 마지막 주자는 전부 반에서 체육 좀 한다는 남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선은 정말, 정말 빨랐다. 그리고 연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까지 하고 나왔다. 선이 가볍게 튀어 나가자마자 벤치에서는 함성이 터졌다. 선은 혼자 모터를 단 것처럼 손쉽게 앞에 옹기종기 뛰던 세 명의 남학생을 제치고, 조금 멀찍이 앞서 나가던 두 명을 가볍게 재쳤다. 차이가 많이 나던 1, 2등만 앞에 뒀을 때는 고작 반 바퀴를 돌았던 시점이었다. 순식간에 뒤쳐진 남학생들이 얼빠진 얼굴을 했다. 뒤쳐지는 자기 반을 보며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던 연이 벌떡 일어났다.

  선은 무서운 속도로 앞의 1, 2등과의 격차를 줄였다. 2등 주자는 ‘어어 너 뭐야!’하고 소리를 지르며 제쳐졌다. 1등으로 달리던 3반 주자는 여유 있게 뛰다가 함성을 듣고 뒤를 돌아보고는 식겁해 전력 질주 중이었다. 마지막 20미터를 남겨두고 선은 3반 주자 바로 뒤에 뛰고 있었다. 운동장은 유례없이 시끄러워졌다. 10미터를 앞두고 선은 3반 주자를 한 번 앞섰다가, 거의 나란히 뛰었다. 9, 8, 7, 6, 5, 4, 3, 2, 1,... 선은 아슬아슬하게 먼저 골인 선으로 뛰어들었다. 1초도 차이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솔이 달려와 선을 끌어안았다.

“이선 최고!!!!!”

저 멀리서 연이 물통을 들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무릎이 아픈 건 아랑곳 않고 상기된 얼굴이었다. 1반은 4등이었다. 다행히 선전해서 아슬아슬하게 꼴등은 면한 모양이었다. 계주는 마지막 경기라고 점수 차이를 많이 주는 편이었다. 체육 선생이 ‘너 훈련 때도 이렇게 열심히 안 하면서-!’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가까이 왔지만 역시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마 선은 내일부터 정말 특훈에 끌려갈지도 몰랐다. 그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사실은 끝내 줬다. 반 남자애들도 언제 못되게 굴었냐는 듯이 ‘와, 이선 아까 처음에 나가자마자 세 명 따라잡는 거 봤냐, 총알인 줄.’ 하며 흥분해 떠드는 중이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온 연이 얼른 물통을 내밀었다. 선은 드물게 활짝 웃으며 물통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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