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udi Sep 02.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6-

자유주제 : 구여친 클럽

    <구여친 클럽>, 끝내주게 재미있는 장르 소설의 제목 같다. 그러나 실재하는 모임이다. 놀랍게도 나는 그 모임의 구성원이다. 이름만 보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 모임은 어떤 한 남자 A와 연애했던 여자들의 모임이다. 꼭 여자여야 할 필요는 없고, A가 꼭 남자여야 한다든가 하는 조건은 없지만 현재 구성원의 공통점은 그렇다. 어떻게 구여친들끼리 모임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인 이랑을 소개해야겠다. 구여친 클럽의 시작은 이랑의 담대함에서 시작되었다.

  이랑은 내가 가장 오랜 기간 연애를 한 전 남자 친구 A가 나와 헤어진 후 만난, 그러니까 A의 전 여자 친구 중에 한 명이다. '전 남자 친구'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A는 그중에서 가장 추잡하고 구질구질한 종류의 인간이다. 보통 그런 류의 남자를 겪고 나면 사람은 그와 관련된 일들에 치를 떨게 된다. 나도 그랬다. 나는 A와 이랑이 연애를 할 때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A의 과시적 연애 습관을 문득문득 인터넷에 거 마주치면서 매번 짜증이 솟구쳤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나는 A가 얼마나 해로운 부류의 남자인지를 꽤 자주 이야기하고 다녔기 때문에, 내가 떠드는 말에 충분히 접근할 수 있으면서 A와 연애하는 이랑을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랑이 A와 연애하는 걸 한심하고 짜증스럽게 여겼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거기에 A는 이랑에게 나에 대해 허위 사실이 뒤섞인 거짓말을 늘어놓아 나를 아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데 도가 튼 남자였다. 이것이 나의 흑역사이기도 한데도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런 조건 하에서 호의적으로 이랑이 나에게 처음 접근한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구질구질하고 저열한 전 남자 친구의, 자기를 아니꼬워하는 티가 팍팍 나는 전 여자 친구에게 "저기요 저 님 좋은데요, 우리 얘기 좀 해요." 할 수 있는 용기, 거기서 구여친 클럽이 시작되었다.

  이랑이 처음 나를 SNS에서 팔로 했을 때 나는 뭐지? 싶었다. A는 내가 만난 모든 남자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런 그가 이랑에게는 좋은 남자였을 거라고 1%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과 헤어진 전 남자 친구의 전 여자 친구가 눈에 들어올 때 좋은 감정을 느끼느냐는 별개의 문제였다. 이랑은 그냥 좋아하는 구독자처럼 발랄하게 말을 걸었다. 님 왜 저한테 친하게 구세요?라고 하기도 뭐한 문제라 우물쭈물하다 보니 정신 차렸을 때, 나는 이랑과 약속을 잡고 파리 한복판에서 맞닥뜨렸다. 이러이러해서 저한테 친근하게 굴기 좀 불편하지 않았나요? 하는 질문에 이랑의 대답은 한마디로 대단했다.

"제가 요즘 전남친의 구여친들과 친구 하는 데 재미를 붙였거든요."

  이랑의 말은 그랬다. 남자 친구가 생겼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정말 이상한 사람이지만 이랑은 글을 좋아해서 팔로하고 있던 그의 전 여자 친구가 자기를 저격하는 내용의 포스팅을 했더란다. '쓰레기(A)랑 헤어지고 핵폐기물을 만나네?'라는 내용의. 그 포스트를 본 이랑의 감상은 이러했더란다.

'아무리 얘가 쓰레기여도 A보다 더 쓰레기 일리는 없는데? 뭘 잘못 알고 계신가 보다.'

  그래서 이랑은 그분에게 이 남자는 당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던데 왜 그렇게 말씀하시나요? 제가 뭘 잘못 알고 있나요? A는 진짜 쓰레기인데 이 남자가 혹시 정말 그렇게 이상한 남자인가요? 하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두 여자는 허심탄회한 대화 끝에 오해를 풀고 절친이 되었는데, 매개체가 된 남자보다 그 구여친이 너무 멋진 사람이라 개이득이었노라는 이야기. 그래서 이랑은 역시 전 애인 A보다 마음에 들었던 그의 구여친인 나에게까지 연락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신나게 수다를 떨고 역시나 절친이 되어 나는 곧바로 서울-부산 거리에 있던 우리 집까지 이랑을 초대해 밤을 새워 놀았다. A라는 인생 최악의 남자가 남긴 최고의 흔적이 이랑이다.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랑의 용기에 감명받은 나는 시답잖은 남자들 때문에 미워하지 않아도 될, 어쩌면 인생의 귀인이 될지도 모르는 여자들을 미워하거나 불편해하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남자(들)는 오점이지만 그 오점 때문에 놓치기엔 아까운 인연이 너무 많았다. 이랑에게 전도된(?) 나도 전 남자 친구들의 전 여자 친구들과 솔직한 대화를 시작했다. 남자를 사이에 두고 생긴 오해들은 기껏해야 몇 시간 진솔한 대화 끝에 전부 해결되었다. 몇 년을 트라우마로 안고 있던 기억들을 다시 파내어 좋은 것들만 닦아 남겨두는 일은 에너지 소모가 컸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름다운 인연들로 이어졌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용기의 형태가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랑의 용감함이 슈퍼 히어로의 용감함이다. 이것도 일종의 어떤 사람을 구해내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잠시 불편하거나 공격적인 사람에게 진솔하게 다가가 나쁜 기억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어 긍정적인 경험을 심어주는 것. 이랑의 구여친 클럽은 가장 긍정적인 형태의 여성 연대 중 하나다. 또한 가장 구체적인 형태의 소통이기도 하다. 그냥 진솔하게 다가가서 이야기하는 단순한 출발로 치유까지 나아가는 방법을 실천하고 사는 이랑에게 오늘의 마감을 헌정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100일 글쓰기 마라톤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