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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Sep 05.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8-

자유주제 : 연성 (1)

  연성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나요? 등가교환의 법칙일 수도 있고 연금술 일 수도 있겠으나 저는 '2차 창작'입니다. 인터넷 용어로써의 연성 말이지요. 처음에는 원작이 있는 콘텐츠의 두 인물을 커플로 상상한 2차 창작물(주로 BL)을 연성이라고 불렀지만 요즘에는 많은 장르적 창작물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이지요. 물론 보통은 원래의 의미로 이해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저는 이 연성이라는 단어를 꽤 좋아하는데,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인기 일본 만화에서 연금술사가 연성진을 사용해 물리, 화학적 현상을 일으키는 행위를 콘텐츠 창작 행위에 빗댄 것이 재미있어서입니다. 연금술의 연성이 판타지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관계가 없던 재료(이를테면 공기 중의 산소와 마찰력)에 관계를 부여해 새로운 물질로 바꾸는 행위라는 점에서 더욱 재미있기도 합니다. 같은 이유로 '찐다'는 표현도 좋아해요. 글(썰)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그걸 요리의 한 순서인 '찌기'에 빗대는 거니까요.

  아무튼 오늘의 주제는 연성입니다. 방금 끝내주는 존잘님의 해리포터 연성을 봤기 때문입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1편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죠. 냉철하게 판단했을 때 <해리포터>는 재미있지만 설정이나 스토리의 구멍도 은근히 많고, 차별적인 요소가 있기도 합니다. 아시아에는 일본에 '마법학교'라는 마법학교가 딱 하나 있을 뿐이고 호그와트에는 정통 영국인만 입학할 수 있다거나 하는 작가의 말들을 제발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어 지죠. (<해리포터>는 죽음의 성물이 마지막 권수로 다른 시리즈는 외경입니다. 반박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2000년도에 청소년기를 보낸 저와 많은 제 또래들에게 <해리포터>는 일종의 컬트입니다. 컬트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네요. 전 세계 어디를 여행하며 완전히 타지에서 온 사람을 만나도 그가 내 또래고, 어렸을 때 책이나 영화를 좀 봤다면 언제든지 해리포터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성을 봤을 때 이 위상이 얼마나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로 전 세계의 한 세대에 미친 영향만 보더라도 해리포터는 어떤 명실상부한 위치를 차지할 것입니다.

  저는 <해리포터>에 대한 깊은 애증을 갖고 있답니다. 마지막 남자 친구와는 해리포터 이야기를 시작으로 싸우다가 결국 헤어졌죠. 해리포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캐 해석의 차이 때문은 아닙니다. 주제가 '해리포터'가 될 것 같지만 잠시 그 얘기를 좀 해볼게요. 전 남자 친구 B는 동유럽 출신의 백인 남자로, 제가 살던 스트라스부르에서 유학 중이었습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얼마 전 런던 여행에서 산 래번클로 기숙사의 목도리를 매고 있었어요. 판타지 소설 덕후였던 B는 대번에 그걸 알아보고는 우리가 마치 운명인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너도 래번클로구나?' '당연하지. 래번클로가 가장 훌륭한 기숙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해리포터는 우리 세대의 컬트라고. 그는 저보다 네 살인가 어렸고, 오스트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유학한 아버지와는 영어로만 대화를 하고 어머니와는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로, 그리고 형제들과는 온 가족이 함께 이민 가 쭉 자란 폴란드어로 대화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화학 전공이었고요. 저와 살아온 환경이나 문화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몇 시간이고 해리포터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허마이오니가 얼마나 끝내주는 먼치킨 캐릭터이며, 해리의 반려동물인 부엉이 헤드위그가 죽었을 때 얼마나 슬펐는가와 같은 얘기로 말이죠. 그랬던 저와 B는 어떻게 <해리포터> 때문에 헤어진 걸까요?

  시작은 평범했습니다. B는 자기 과에서 목요일 저녁에 해리포터 테마파티를 하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어요. 저는 가벼운 마음으로 좋다고 대답했죠. 그때 <신비한 동물 사전>이라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외경 중 굉장히 유명한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이 개봉한 참이었는데 저는 그 영화의 캐스팅이 몹시 마음에 안 들던 참이었습니다. 캐스팅과 관련된 논란에 작가인 롤링의 대응도 형편없었고요. 그래도 해리포터 테마 파티는 갈 수 있죠. 화학과 휴게실에는 <빅뱅이론>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너드들이 가득했고 거기서 싼 맥주를 마시면서 덕 토크를 하는 건 당연히 즐거울 것 같았어요. 그러나 B의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나는 볼드모트 분장할까 해. 너는 내기니를 하면 어때? 마침 이번 영화의 내기니 캐스트도 한국 배우(김수현 분)이니까."

"뭐 이 새끼야? Sorry, but what the fuck?"

  그렇게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인도네시아 설화에서 딴 이름을 가진, 점점 뱀으로 변하며 자아를 잃는 동양인 여자가 20세기 초 미국 서커스에서 뱀 변신 쇼를 하다가 탈출해서 나중에는 완전히 뱀이 되어버린 뒤 영국인 나치의 애완동물이 되어 착취당하다가 영국 백인 남자 영웅의 용감한 전설의 칼로 죽는, 그 내기니 말이지?'라고 물었고 그는 자기 말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과하겠지만 너 너무 오버한다고 대답했죠. 그렇게 전쟁은 시작됐고 예전 나치 지지자인 오스트리안의 손자로서 폴란드에서 자란 것이 트라우마인 가엾은 청년을 울리고 귀가하며 이별을 고했습니다.

  <해리포터> 시리즈에 대한 저의 깊고 복잡한 애증을 설명하기에 완벽한 에피소드네요. 아무튼 비판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저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인물 하나하나를 몹시 사랑하고, 허마이오니와 허마이오니가 살린 머저리들과 함께 성장했으며, 호그와트 입학 편지를 몇 년 동안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본격적인 <해리포터> 2차 창작물을 소비하지는 않았어요. 팬카페에 가입해 기숙사 배정을 받는다든가 하기는 했지만 저는 다른 덕질도 해야 했고 스네이프의 "Always"가 지구를 휩쓸었을 때에는 2차 창작이라는 장르에 완전히 관심이 없었던 시기였거든요. 그런데 최근 어떤 존잘님이(드디어 이 존잘님 이야기로 돌아왔군요.) 늦게 입덕 해 올리시는 연성물이 너무 좋은 거예요. 어떤 점이 좋은가 하면 시리즈의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긴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에서 언급되지 않은 부분들을 상상해내는 부분이 좋았어요. 제가 생각하는 '좋은 연성'의 기준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칫 과하게 느끼하거나 설정을 지나치게 남발해 캐릭터에게 가질 수 있는 거부감을 줄이면서 원작에서 좋아한 부분들을 살려내는 것인데, 이 분은 그걸 탁월하게 잘합니다. 책에서는 조금 지질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해리는 유년기의 모험과 목숨을 건 전투들을 소화하고 다정하고 멋진 어른이 되어있습니다. 머글 학교에 입학하기 전 교과서를 미리 달달 외웠다가 졸지에 마법 세계의 학교에 가게 된 허마이오니는 자기가 학교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론은 한때는 딜루미네이터를 보면 어쩔 수 없이 호그와트 결투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고는 했지만 이제는 자식들과 조카들에게 신기하지 않으냐고 보여주며 장난을 칩니다. 이런 애정 가득한 연성을 보면 마음속 짜증과 비난 밑에 깊숙이, 하지만 확실히 자리 잡고 있던 작품에 대한 사랑이 살아날 수밖에 없다고요.

  아직 쓸 말이 많은데 마감 시간도 넘어버렸고 길어지네요. 좀 졸리기도 하고요. 이 주제는 내일 계속 이어 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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