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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Sep 06.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9-

자유주제 : 연성(2)

  어제 원고에서는 2차 연성 문화에 대해 아는 체를 해보았지만, 사실 저는 머글에 가까운 인간이었습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말이죠. 아무래도 동인, 후죠시 등으로 불리는 오타쿠 최적화 SNS를 자주 이용하다 보니 용어나 문화에 대해서 아주 문외한이었던 적은 없으나 저 자신이 덕질을 하는 장르는 없었으니 말이죠. 하나 있다면 페미니즘일 텐데, 지금도 저의 최애 장르는 결국 페미니즘이지만 페미니즘은 연성이나 뭐 그런 걸 하는 장르는 아니죠. 그러다가 올해 초, 친구의 마수에 걸려들게 됩니다.

  

  <전지적 독자 시점>입니다. 싱숑 작가의 현대 판타지 소설로, 10년이 넘게 삼천 편이 연재되는 동안 유일한 독자였던 주인공 '김 독자'가 읽던 노잼 설정충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이 현실이 되며 시작되는 내용입니다. 사실 첫 감상은 이랬습니다.

  '문장 더럽게 못 쓰네!'

  악플이 아닙니다. 저는 전독시에 인생을 몰빵 했고 충무로역 4번 출구에서 패왕 유중혁과 셀카도 찍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일일 연재인 전독시와 현판 소의 특성상 뛰어난 문장을 구사하는 건 쉬운 일도 아니고요. 그렇지만 일단 열 편쯤을 후루룩 읽고, 40편, 100편, 200편을 넘어갔을 때 저는 거의 먹고 자는 것 외에 하는 일이라고는 전독시 읽는 것 밖에 없는 전독시 팡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읽다가 지치면 휴식 차원에서 트위터에 전독시를 검색해 엄청난 고퀄리티의 팬 일러스트나 만화, 상상을 기반으로 한 '썰'등 존잘님들의 연성을 탐색하다 잠이 들고는 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장르를 파기(파다, 는 표현도 재미있죠.) 위해 존잘님들 구독용 덕질 계정을 만드는 데 이르게 됩니다. 제가 최신 연재분까지 따라잡았을 때에는 '기간토마키아'가 막 끝났을 때였습니다. 김 독자와 <멸살법>의 주인공인 유중혁, 천재 작가 한수영과 그 동료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의 거대 시나리오를 비틀어 자신들만의 거대 설화를 끝낸 직후입니다. 이 레전드 에피소드를 끝내고 저는 꽤 후유증을 앓았습니다.

  전독시를 읽기 시작해 빠진 동안은 우울증이 극도로 심해졌던 시기입니다. 지난 편에서 언급한 B와 헤어진 직후이기도 했습니다. 최신화를 읽고 초조하게 연재 일정을 확인하면서, 저는 깨닫고야 만 것입니다.

  현대 판타지라는 장르는 현실 도피에 최적화된 마약이라는 것을요... 시간이 있었는데 없습니다. 사라졌어요. 나는 유중혁 김 독자 공단의 건물에서 유상아의 쾌유를 빌고 있었는데 갑자기 현실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전독시는 유례없는 한국 오타쿠들의 대 메이저 장르였고, 매일매일 새롭고 좋은 퀄리티의 연성 물과 썰들이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포스 타입에 가입했습니다.

  전독시 2차 연성의 가장 메이저는 아무래도 BL 연성을 하던 팬들이 많다 보니 김 독자와 유중혁을 커플로 엮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몇 년 만에 BL 연성을 보다 보니 기분이 새롭더군요. 가장 즐거웠던 점은 이런 커플 연성뿐만 아니라 제가 전독시를 읽으며 좋아했던 부분을 마찬가지로 좋아한 사람들이 쪄낸 연성들이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여도 어떤 이야기가 현실에 고통받는 소년을 구원해내는 내용에 심장을 정통으로 들이 받힌 기분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만 명의 아바타를 동원해 가장 최상의 시나리오를 전개하는 작가 한수영은 또 어떻고요? 아름답고 유능한, 현실이라는 장르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정 내의 성차별이나 여성 혐오에 시달리면서 치열하게 살고, 갑자기 바뀐 장르에서도 최선을 다해 선함을 추구하는 유상아는요? 멸악의 심판자라는 타이틀 만으로 정희원의 멋짐은 얘기가 끝나지 않았나요? 몇 만년 동안 스타 스트림의 세계선 속을 떠돌면서 감정이 마모되어 파멸을 꿈꾸다가, 자신을 고통받게 한 세계의 질서를 거스르는 새로운 이야기의 꿈을 꾸게 된 43회 차의 신유승은 정말 감탄만 나오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몇 번이고 같은 삶과 비슷한 비극을 반복하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유중혁이 있지요. 자기 고유의 이야기의 뻔함과 구조적 모순에 질려 있다가 타인의 이야기를 보고 공감하고 연민하고 종국에는 자신의 이야기까지 바꿔버리는 우리엘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전독시는 스토리도 흥미롭지만 좋은 캐릭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지점을 좋아한 팬들이 많았죠. 우리엘은 왜 김 독자와 유중혁의 전우애에 유독 집착할까? (물론 표면적인 이유로서 우리는 이미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엘이 꿈꾸는 김 독자와 유중혁의 금지된 전우애가 무엇인지 말이죠.) 그러나 가장 많은 악마종과 마족을 사냥하고 '악'의 특성을 띤 상대에 한해서라면 무적에 가까운 힘을 가진 지엄한 대천사는 기억조차 나지 않도록 오랜 세월 동안 이어진 전쟁에 지쳤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추구하던 선과 그가 대립하던 악에 대한 회의감도 느꼈을지 모르죠. 그런 그를 지탱한 것은 어쩌면 선과 악이라는 가치들보다 전쟁에 함께 나서 그의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간 전우 들일지도 모릅니다. 함께 그 오랜 시간을 보내온 대천사들 말이죠. 누군가는 그런 상상을 그림으로 옮겼고, 누군가는 고시원을 전전하며 친척들에게 외면받고 미디어에게 사생활을 침해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김 독자에게 지구가 유료화된 후 김 독자가 얻은 동료들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이상한 시나리오가 발생해 김 독자 컴퍼니는 고등학생 김 독자를 마주해 그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김 독자에 과몰입한 오타쿠 같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김 독자를 행복하게 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당신이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아직 쓰이지 않았다면, 당신이 바로 그 책을 써야 한다."

  위대한 작가 토니 모리슨의 말입니다. 저는 연성의 폭포 속에서 너무나 즐거웠지만 아직 부족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수영과 유상아는 사랑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한수영과 유상아를 연결한 연성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진지하게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정말 징그러운 오타쿠 같을 것 같네요(이미 늦었나요?). 아무튼 부족했습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제가 직접 쓰는 거죠. 그렇게 저는 구독을 위해 만들었던 포스 타입 계정을 잘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번 포스트로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네요. 저의 오타쿠력을 과소평가한 모양입니다. 자유주제 연성은 내일 공통주제를 마치고 토요일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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