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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Oct 21. 2019

글쓰기 마라톤 - n

공통주제 : 키워드로 이야기 만들기

발 엽서 커피 술 뒷걸음질 틈


시영이 눈을 떴을 때, 솔직히 이렇게 황당하게 골로 갈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진짜 쪽팔리다...’

보통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인물들은 죽음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지난 인생, 그런 것들이 간혹 이야기되고는 하지만 보통은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죽은 건가?’ 하면서 기억을 더듬고는 한다. 그러나 시영은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죽었다.’라고 생각한 순간 암전이 었다. 죽었다, 라고 생생하게 생각한 이유도 단순했다. 와, 이렇게 죽으면 너무 황당하겠다,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이전은 비몽사몽했다. 완전히 술에 취해 있었으니까.


술을 좋아하지 않는 시영의 과음은 순전히 엽서 한장에서 비롯되었다. 엽서는 전 애인에게 온 것이었다. 시영의 죽음만큼이나 황당한 이별이었다. 나란히 영국 워킹 홀리데이를 지원했다가 그는 붙었고, 시영은 떨어졌다. 특별한 이유랄 것도 없었다. 랜덤 추첨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 시영은 씩씩하게 내년을 기약했지만 그는 1년 이상 장거리 연애를 할 자신이 없다며 길고 시시한 변명을 늘어놓고 떠났다. 함께 워킹 홀리데이에 가자고 제안한 것은 시영이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너무 좁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고생도 하면서 시야도 넓히고, 우리의 관계도 더 깊어질 수 있을거야.”


그 새로운 세상에, 결과적으로 시영은 가지 못했고 그는 혼자 떠나버렸다. 따뜻한 커피가 식고 위의 우유 거품이 지저분한 모양새로 말라갈 때까지 변명을 늘어놓고 그는 떠나버렸다. 차가운 커피잔과 시영을 뒤에 두고, 새로운 세상으로.


그래도 괜찮았다. 그가 출국한 후로 시영은 쉴 새 없이 알바를 해서 돈을 모았다. 워킹 홀리데이야 내년에 다시 신청하면 된다. 휴학을 하지 않고 이번 학기를 성실하게 채우고, 겨울 방학 때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그를 보러가기로 마음 먹었다. 2년을 죽고 못 살 것 처럼 사랑한 사이다. 정이 떨어져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시영이 없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는 외로울테니 추운 겨울에 맞추어 만나러 가면 그의 마음도 바뀌리라. 그렇게 독하게 마음을 먹고 열심히 돈을 모았고, 학기가 끝났다. 시영은 통장을 탈탈 털어 비행기 티켓을 구입했다. sns도 전부 지워버리고 떠난 그로부터 엽서 한장이 도착한 건 그 때였다.


엽서는 영국의 한 지방에서 발행한 기념 엽서였다. 시영이 노래를 부르던, 제인 오스틴이 집필하며 긴 시간을 보낸 휴양 도시였다. 고즈넉한 마을 배경이 인쇄된 사진 엽서 뒷장에는 그의 가지런하고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시영에게 이별을 고하고 떠난 그는 쓸쓸한 마음을 안고 런던에 도착했다. 런던의 한 게스트 하우스에서 키퍼로 일을 하면서 그는 휴일마다 자주 여행을 떠났다. 젊은 여행자들이 머무르고 떠나는 숙소들을 돌던 중 두 군데나 우연히 같은 숙소에 머무르게 된 사람이 있었다. 시영과 떨어져 출국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혼자서 시영이 말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히는 데 집중할 생각이었으므로 그와는 깔끔한 우정을 나눌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고, 그는 런던은 아니고 먼 지방에 있는 대학원에 다니는 유학생이고, 각자 시간을 보내다가 주로 여행지에서 다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시영이 말한대로 새로운 환경에서는 사람과 관계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가지고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지금은 그를 깊게 사랑하게 되었으며, 이런 기회를 이야기한 시영에게 매우 고맙게 여기고 있다고. 빼곡하게 적힌 엽서를 다 읽었을 때쯤 시영은 엽서를 구길 듯 쥐어들고 집 밖으로 걸어나가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서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억울하고 창피했다. 자기가 너무나 익숙한 세상에서 익숙한 삶을 살아가는 동안 시영이 노래한 것들은 그 혼자 경험한 것이 억울했고, 그런 것에 도취해서 미안한 줄도 모르고 엽서까지 써 보내는 정성이 뻗친 멍청한 남자를 위해 몇 개월을, 아니 2년 넘게 홀려 있던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비행기 티켓은 환불이 아주 어렵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환경을 부르짖었지만 사실 반겨줄 이도 없는 낯선 도시의 겨울에 도착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처량맞고 슬프기만 했다. 시영은 인정해야만 했다. 시영에게 새롭게 보였던 세상은 그 남자라는 필터가 씌워놓은 것이었고, 그것은 서울에서 비행기를 열 두시간을 타든 자전거를 십오분을 타든 상관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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