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udi Dec 03. 2019

100일 글쓰기 마라톤 - 17 -

HBO 드라마 <체르노빌>

  9/15

  소비에트 연합국에 대한 역사는 잘 모른다. 함께 살았던 동거인 중 한 명이 키예프 출신이었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체르노빌이 키예프에 아주 가깝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화제의 드라마를 보면서 걱정한 것은 미국인이 만든 비 영어권, 그것도 소련 배경의 실화 (게다가 세계적인 인재를 다룬) 드라마가 과연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직전에 본, 미국인이 소련을 등장시킨 드라마는 <스트레인저 띵스> 였다. 80년대 스타일만 가져오는 줄 알았더니, 냉전 이데올로기까지 들고 와 잔인한 소련인과 선한 자본주의 체제의 미국인들이 등장하고 너무 징그러워 죽을 뻔 했다. 그런데 <체르노빌>은 그에 비하면 아주 괜찮았다.

  비판해 마땅한 인물들 외에 쓸데없이 조롱하거나 과대하게 비극을 강조하는 장면이 적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스베틀라나 알렉셰이비치의 서술에서 등장할 법한 구소련 사람들의 캐리커쳐가 드러나는 것도 좋았다. 사건 자체의 재구성도 이해하기 쉬웠다.

  물론 아쉽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 크라운>의 조지 6세, <맘마미아>의 영국인 탐험가, <미스포터>의 비어트리스 포터의 절친한 친구가 문제를 해결하며 의견을 좁히고 유대감을 형성한다든지 하는 미국식 버드무비 공식에서 아주 자유롭지는 않았으니까. 당연히 미국인의 시선에서 본 소련이라는 점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마 이 사건이 실제로 일어난 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접근할 만한, 이 수준의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드라마가 어떻게 제작될 것인가 생각하면 아쉬운 대로 높은 평점을 주게 된다. 물론 그런 드라마가 이미 있지만 내가 모르는 걸 수도 있다.

  몇몇 완성도 높은 장면들에서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인류에 대한 복잡하고 강렬한 감정이 차오르기도 했다.

  <체르노빌> 직전에 본 재난 컨텐츠는 <엑시트>(...) 였기 때문에 비교하기 좀 애매하지만 둘 다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하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그에 대해 매우 신중히 접근하는 작품이며, 하나는 픽션에 오락물에 가까운 작품이라 확연히 다르기는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재난물이 절대 지켜야 하지만 쉽게 잊고 마는 기준을 존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비극이나 피해자들에 대한 예의바른 시선이다. 감정과잉이나 영웅주의, 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한 과도한 연출이 잘 조절되고 있다. 그 덕에 오히려 보는 내내 재난과 그 안의 사람들에게 온전히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엑시트>의 경우에는 2014년 이후 재난물을 보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사건을 정면으로 연상시키는데, 그 과정에서 실제 사건에 대한 어떤 관음적 소비도 느껴지지 않고 말끔했다. 그러나 그 사건을 떠올린 모두 그 장면이 지난 후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체르노빌>에서 좋았던 장면은 석탄부 장관의 어깨를 저마다 툭툭 두드리고 지나가는 광부들, 소젖을 짜며 자신의 삶을 단호하고 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여인이다.

  울라냐 호뮤크가 여성인 점도 좋았다. 이런 캐릭터가 창조되어 삽입된다면 여성이어야 마땅하다하고 생각했다. 체르노빌을 바라보며 이오딘 알약 재고가 있는지 묻는 의료진이 여성인 것 또한 같은 이유에서 좋았다. 이 드라마를 보고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구매했다. 읽고 나면 또 다른 감상이 생길지 두고 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100일 글쓰기 마라톤 -16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