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페미니스트, 한국인, 여자, 유학생
"환상은 힘이에요. 최대한 환상처럼 살기 위해 노력하시되 현실을 직시하세요."
건방져보이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추상적인 조언을 할만큼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말이 24시간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내가 남에게 해준 말을 바보처럼 되새겼다. '환상처럼 살기 위해 노력해야지. 환상은 힘이니까.' 다른 훌륭한 누구도 아닌 내가 한 말인데 그 어떤 말들보다도 힘이 되었다. 환상은 힘이에요, 살기 위해, 환상처럼, 노력하세요. 살아가기 위한 힘.
책을 탐내듯이 게걸스럽게 읽어해치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를 질리지 않고 집중해서 해치우는 사람, 상냥하게 꽃과 동물을 돌보고 구석구석 방에 애정을 채우는 사람. 빠릿하게 해야 할 일들을 하고 나가지 않더라도 낮에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정돈된 몸짓으로 생활하는 사람. 외국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운동을 하고 성취욕을 느끼는 사람. '어떠하게 살고 싶다'는 사소하지만 강렬한 환상들이 분명히 있었다. 무기력하거나 혹은 머릿속이 너무 바빠서, 우울감으로 잊어버렸던 수많은 환상들이 떠올랐다.
극단적으로 감정이 바닥으로 치닿던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나서 하고싶은, 즐거울 것 같은 일들로 하루하루를 채우기 시작한 지 몇 주쯤 된 날이었다. 분명히 이렇다할 성과가 나오는 일들은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즐거운 일들을 하나라도 하다보니 잠들기 전에 패배감이나 자괴감이 들지 않았다. 작고 사소하지만 하고싶었던 일을 하나 하고 나면 좀 더 어려운 일을 하고 싶어진다. 좋아하는 음식들로 아침을 먹고 나면 부엌을 청소하고 닦고 싶어지고, 방을 치운다고 생각하지 않고 방을 꾸미자고 생각하면 방이 깨끗해진다. 방을 깨끗하게 하고 나면 말끔한 책상에서 글을 쓰고 싶어지고, 억지로 읽지 않으려 미뤄두었던 책을 다시 펴게 된다. 처음엔 구체적이고 작은 '하고싶은 일'이었는데 어쩌면 사치품일지 모르는 꽃 한다발을 방에 꽂아놓고 나니 내가 이런 낭만적인 공간을 꿈꿨던 것이 기억이 났다.
자란 동네와 완전히 다른 이국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익숙해지고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어쩌면 더이상 덜 하기 싫은 일을 선택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조금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해야지, 하고 전날 밤 마음먹은 일들을 다음날 전부 해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또다시 좌절할 지도 모르는 나를 위해 요즘 느끼는 고무적인 감정을 꼭 남겨두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해.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게 조금씩 힘이 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