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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udi May 14. 2016

2016.05.13

아카이빙 - 남성 간의 연대에 관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 대한 남성들 간의 연대에 대해 생각한다. 수천년동안 이루어진 때로는 암묵적이고 때로는 노골적인,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었던 연대 말이다.

  어느날 한 여성이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침해당했다. 여성은 고민하다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사과와 집단의 책임을 요구했다. 이 집단의 남성들은 행동의 방향성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어느정도는 정말로 성폭력에 분노하기도 했고 가해자의 행동을 옹호하는 건 위험한 일이라는 판단을 할 능력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가해자는 어쨌든 꽤 괜찮은 사람인데, 그 일은 정말 순식간의 실수일텐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거부를 하지 않아서 그는 몰랐을 수도 있어.' 이런 비슷한 생각들이 그들의 머릿속에 동시다발적으로 스쳐지나갔다. 조금 더 멍청한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우회적으로 입밖에 내놓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사건은 이 시점에서 진흙탕이 된다. 가해자는 이런 은연중의 두둔에 힘입어 당당하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피해자의 요구가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과한데다 어쩌면 인권침해적일지도 모른다는 식의 이야기가 오간다. 이중 좀 더 저열한 사람은 중립적인 체 하는 언어로 피해자의 평소 언행을 들추기도 한다.

  사건은 지지부진하게 자잘한 논란을 동반하며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는다. 가해자가 잘못하긴 했지만 그가 사회에서 새로운 기회를 잃지는 않기를 바라는 남성연대의 구성원들은 용기있게 그와 어울리며 그의 힘을 북돋아준다. 그런 행동이 가해자가 저지른 행동을 사소한 일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을 모른 체 하거나 정말 모르는 채로.

"잘못하긴 했는데, 애 인생을 망쳐놓을 만큼은 아니잖아?"
폭로 전까진 멀쩡하게 착한 사람인 척 일상을 영위하던 가해자가 갑자기 죄책감 때문에 자살이라도 할 것처럼. 마치 성추행 가해가 폭로되어 처벌받은 것 때문에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패널티를 당한 사람이 흔한 것처럼.  

  가해자에 대한 옹호와 혹시 미래에 '자기가 저지를 지도 모르는' 폭력에 대비한 처벌 및 대처 시스템에 대한 방해 하나하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언어나 행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남성 연대의 방해 하나하나가 모여 커다란 흐름을 만든다. 피해자를 비롯한 모든 관계 구성원에게 스트레스를 주며 자잘한 일거리를 하나씩 더 던져주는 것이다. 이렇게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려는 사람들을 괴롭히고, 가해자의 죄책감을 완화한다.

  이런 남성들 간의 연대의 치졸한 행동들은 가해자에 대한 감정이입에서 시작돼서 가깝거나 먼 미래에 자신이 가해자의 위치에 섰을 때도 여전히 이렇게 불안정한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길 바라기 때문에라고 밖에 해석할 수가 없다. 예비 성폭력범이라고 부르면 화낼테지만, 예비 성폭력범이 아닌데 성폭력범에 대한 메뉴얼 제작과 처벌에 이렇게 훼방을 놓을 다른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피해자나 그의 편에 선 사람들을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부디 멈추면 좋겠다. 이성은 가랑이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혀 사소하지 않고 가해자가 당장 수개월 정도 실질적인 패널티를 받고 어쩌면 평생 창피한 기억을 갖게 되는 것은 그가 자초한 일이고 인권침해가 아니다. 당신이 그것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면 그건 가해자를 처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신 스스로의 문제다. 왜 내가 가해자가 당하는 일에 이렇게 화가 나는지 스스로 되짚어봐야할 문제란 것이다.

  지금 피해자의 고민과 고통이 아니라 자기가 초래한 일 때문에 책임을 져야하는 가해자에 더 공감하는 건 당신이 가해자와 더 가까운 유형의 인간이라서인가?

  아주 절망스럽게도—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남성 간의 연대가 가장 위협받는 시기는 전세계의 전 역사를 통틀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오늘 이 순간보다 남성들끼리의 연대가 경멸받고 존경심을 잃은 순간은 없었다. 여전히 공고하고 힘이 세지만.

  역사적으로 이 남성들간의 연대가 해온 일들은 이렇다. 그들은 여성을 강간하고, 때리고, 죽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이 그들과 대등한 존재가 아니며 여성에겐 거부권이 없고, 심지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능력도 없다고 여겼다. 여성에게도 남성 철학자들이 찬양해 마지 않은 훌륭한 지성을 누릴 능력이 있으며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일들을 결정하고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려는 여성들과 일부 남성 연대의 이단아들에게는 가차없이 응징했다.

  너는 우리 남성에게 사랑받고 보살핌받지 못하는 여자가 될 것이며, 네가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그 행위들을 너에게 그대로 저지름으로써 너를 응징하겠다고 협박하거나 많은 경우 실제로 그렇게 응징했다. 이러한 응징은 다행스럽게도 인류가 매우 더디게 문명화되면서 정당성을 잃어왔다. 남성간의 연대는 전략을 조금 바꿨다. 그리고 많은 남성은 여전히 여성을 강간하고 폭행하고 죽임으로써 천년전과도 별 다를 바 없는 전략을 유지하고 있다.

  스스로 진보를 참칭하는 남성들, 즉 여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행동에는 문제를 느낄 만큼은 문명화한 남자들은 전략은 조금 달라졌다. 그들은 2차 가해라는 "엿같은" 모호한 용어로 비판받으면 사과를 하기도 하고 여성의 평등을 꽤 적극적인 언어를 옹호하기 시작했고 조금은 자기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기도 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남성간의 연대에 치졸한 방식으로 가세하는 걸 멈추지는 않는다. 이 추접스러운 연대는 여전히 그들에게 기득권을 부여하고 있고 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대는 내게는 지나치게 더딘 속도로,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더 많이 경멸당할 것이고 좀 더 똑똑한 남자부터 이 연대와의 연결을 끊고 도망가 가장 먼저 그를 공격하기 시작할 것이다. 여성들은 피해자가 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직간접적 폭력을 고발하고 끊임없이 그들을 불편하게 할 것이며, 그들은 점점 더 사회의 무시할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을 감시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주변화하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기 위한 남성의 연대는 시시각각으로 최후통첩을 맞이하고 있다. 내게는 충분히 빠르지 않지만 만약 당신이 빨리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아마 순식간에 당신은 구시대의 유물로 손 댈 수 없는 꼴통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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