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토론장이 아니라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 옳다고 보이도록 선전하는 것, 옳음이 아니라 옳음의 이미지를 깃발처럼 쳐드는 것이니까' (이국에서, 이승우 중에서)
학문적으로 정치적 이념의 구분은 좌우로 세분화되어 있어 그 깊이는 잘 모르겠다. 깊이 있는 독서와 공부가 배양이 되어야 주체적으로 분석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내비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의견을 내본다면 왜 어디서 극단적 유정치적 다툼이 심화되는지 되짚고 싶어서이다.
근데 정치적 무관심은 이미 정치와는 아예 무관한 본연의 무정치적, 환멸을 느낀 탈정치적, 정책과 노선의 이탈인 비정치적 무관심으로 분류되나 과거 무정치적 성향이 반전하여 현재 실생활에서의 정치적 향유는 거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일명 양극화의 극단적 흐름의 색채를 띠는 것 같다.
무관심은 분석이 가능하고 원인만 제거되면 시간의 흐름 즉, 역사의 반복과 순환 속에서 자동으로 다시 참여하는 계기도 마련되고 또 그런 기회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것이 나름 얕고 깊은 대상의 몰입과 집중 그리고 자기 준비의 여백을 무관심의 기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작동되어 보편타당성을 유지해 주기 때문이다.
판단의 오류를 방지하는 자정의 효과는 인간의 시계와 같이 진행되는데 나이 듦에 따라 생물학적 분별력은 저하되지만 그와 동일하게 시간의 틈이 주는 여백의 효과는 생물학적 판단의 미스보다 우월하다. 이 차이는 각자 전문적 배움의 깊이보다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공통적 상식적 정서에 더 좌우되므로 전체적으로는 동시대를 대변해 준다.
반면 극단의 보편화와 확장성은 여백의 효과를 무디게하는 선동과 중독에 기인하는 것인데
선동은 타인의 영향이고 중독은 오로지 자아의 영역이다. 깊이와 다르게 중독은 충만해지는 깊이와 달리 채워도 채워도 갈망만 심화되는 실체가 허구인 소모적 편향적 정서이다. 깊이는 선동의 효과가 한계적인데 반면 중독의 선동 흡인력은 상대적으로 크다.
알코올, 도박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중독의 영역은 외로운 결핍에서 올 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중독의 요소인 욕심에서 기인된 집착과 편집 그 자체인 것이다. 욕심은 절제가 잘 안 된다. 판단이 흐려지니 부류에 의존하게 되고 따라서 증명이 기준이 되는 과거 지향적일 수밖에 없고 정체된 과거에 머무르니 시대착오적일 수밖에 없다.
시대가 변하니 선도 변한다. 금도의 선, 금기의 선이 무시되니 자기의 선도 무너진다. 비매너적이고 막말의 황폐 그리고 물리적인 힘은 오늘날 정치현장에서도 진행 중인데 여기서 탈정치적 무관심으로 흐르지 않고 극단의 대결의 정치적 중심에서 자기의 목소리만 내는 문화가 형성된다.
이게 세월이 흘러 무디게 조금씩 극단의 흐름으로 변질된다. 그 수가 조금씩 조금씩 불어나서 하나의 기류가 형성되는 것이 어쩜 정상적인 민심의 발로의 메커니즘을 닮아 있지만 정작 그 반대인 극단의 봉우리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중독된 자아로 채워도 갈증이 해결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된다. 근데 이런 걸 결속, 결집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까?
답은 아니다. 차츰차츰 무너짐의 결과이다. 선이 무너졌고 말이 무너졌고 태도가 무너지고 서로의 욕심안에서 그렇게 만난 것뿐이다. 세대, 지역, 성별 그렇게 극단적으로 멀어지고 가까워지길 반복했던 학습이 SNS와 같은 중독성 도구와 만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 만남은 더 발전된 매체로 지속된다.
'티끌 하나정도가 모자란 거의 완전한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티끌 하나 정도가 모자란 거의 완전한 의심이 아니다. 티끌 하나 정도의 의심만으로 티끌 하나 정도가 모자란 거의 완전한 믿음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무너진 믿음은 티끌하나도 모자라지 않는 완전한 믿음, 즉 광신이 되어 복수한다'
학문적으로 반역과 혁명은 이미 구분되어 있는 정치적 행태인데 실제적으로 결과적으로 구분되는 감각적 행태만 뇌리에 중독시킬 뿐이다. 반란이 어떻게 성공했다고 혁명이 되는가? 욕심에 중독된 자가 오역을 할 뿐이다. 반면 중독이 아닌 깊이는 성찰을 깨우치게 하고 종교적이진 않더라도 인류보편적 가치를 한번 더 뒤돌아 보게 한다.
이제 정치적 간헐적 무관심조차 단죄받고 이쪽저쪽에서 단절된다. 종교적 거룩함도 힘이 부치고 문학과 예술의 영역도 조심스럽다. 중독처럼 극단은 사소한 문화적 붕괴에서 시작된다. 그 붕괴의 시작이 망하는 길인지 새로 태어나는 길인지 낙관도 비관도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만 분명할 뿐이다.
혼탁한 중독의 선은 갈등과 혼돈을 피할 수 없는 선이지만, 사유와 깊이의 선은 제스스로 탄력적 회복력으로 굳건히 선명함을 유지한다. 같은 생각 같은 행동만 강요하는 세상보다는 상식적인 세상에 수량이 무한한 그런 단순한 다양성이 보장되고 각자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는 중독이 아닌 깊이 있는 삶이 그리운 시대이기도 하다.
정치적 무관심에서 양극단으로 변질되고 기울어진 메커니즘의 과정을 나열해 보니 잠시나마 서로가 무관심한 상태로 여백을 비워 놓는 틈을 가지는 것도 극단을 차단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집착을 내려놓고 무리의 삶에서 각자의 삶으로의 환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사고를 가져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극단이 판치는 세상은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들 사연이 있어요. 대를 이어 살아온 자기 나라를 그냥 떠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살 수 없어 떠났지만 이 친구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다시 돌아가려면 그곳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야겠지요. 그래서 떠도는 거예요. 그곳에 아직 못 가니까,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그곳에 기어이 이르려고, 어떤 사람은 죽기 전에 이르지 못하고, 그 아들이나 딸, 그 아들이나 딸의 아들이나 딸을 통해 경우 이르게 될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이르려고, 어쨌든 지금은 다른 데로 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국에서 중에서)
-2024년 12월 29일 또 다른 비극이 시작된 날에 쓰다. 2024년이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