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할 때면 넌 매일 녹초가 돼서 집에 왔다. 힘들다, 피곤하다, 지친다, 너무한다. 입만 열면 그런 말들이 저절로 나온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기쁜 것도, 즐거운 것도, 고마운 것도, 좋은 것도 결국엔 다 싫어진다고 했다' (너라는 생활, 김혜진소설 중에서)
한때 중도보수를 지향했던 어느 정치학자의 요즘 행보와 처신이 백골공주라는 언론의 비아냥을 받는 배경은 무엇일까? 어느 노 정치인의 분석에 따르면 권력의 맛에 도취된 것 아닌가, 생선맛을 본 게 아닌가라고 짐작하는데 참으로 씁쓸하다.
변화, 변신, 배신, 변절이라는 어구 중 더 어울리는 여러 단어가 있을 수 있으나 최적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상실이라는 단어를 표현하고 싶다. 그녀 본연의 모습을 상대적 일인칭으로 본다면 관망하는 대중적 입장은 이인칭이다.
즉, 일인칭을 상실한 것! 본연의 자아를 상실한 것인데 이인칭 또한 신뢰에 대한 상실을 맛보게 한다. 본연의 상실은 타자의 상처가 되고 열정의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비난이 따르는 정치 이야기에서 벗어나 사람 이야기로 선회해 보자.
그래서 사람은 함부로 변하면 안 된다. 상실을 버텨낼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지고한 신념보다 더 위험한 것이 유연함을 가장한 변화이다. 기만과 강요에 의한 어설픈 변화는 결국 회의적인 무기력만 증폭시킬 뿐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약한 인간은 그냥 자기 컨셉대로 지성과 열정을 유지한 채 더 큰 것을 상실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인칭에 대한 예의이다. 도대체 변화가 무엇이길래... 소박한 현실에 안분지족이 죄악시되면 그렇게 상실도 동반되는 것이다.
자의에 의한 즉 일인칭 본인에 의한 자아 상실은 어쩌면 또 다른 야욕과 이익극대의 열정을 가장한 오만과 독선으로 치닫게 하고 그 또한 의욕과 활기라고 치부한다면 그와 동시에 삶의 욕심 또한 자생되는 것이다.
반면 타의에 의한 즉 이인칭, 삼인칭 타자에 의한 자아 상실은 어떠한 감흥도 메마르게 소멸시킨다. 강요하면 열정과 동기는 사라진다라는 뜻이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지긋지긋한 현실만 고달플 뿐이다.
'그만하자, 헤어지자, 내내 벼르듯 쥐고 있었던 그런 말은 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내일은, 모레는, 더 좋아질 거라는 말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내일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떼쓰고 우기는 그 억지스러움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런 것을 가리키고 장려하는 세상에는 내일이 없다. 그리고 감흥도 없다. 열정도 재미도 없다. 상실의 시대에 결국 오욕과 탐욕만 있을 뿐이다.
피곤한 하루하루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타자의 상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가득할 뿐이다. 본연의 자아로 회귀하고 싶을 뿐이다. 지친 몸을 보듬고 싶을 뿐이다. 단지 마음이 편하고 싶을 뿐이다. 회복해서 감흥을 찾고 싶을 뿐이다.
-2025년 1월, 첫 번째 글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