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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未練)

선택

by movere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올바른 선택이란 없으니, 일단 하나의 길을 택했다면 "가지 않는 길에는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 (인생의 역사, 신형철 중에서)


인생을 살아내면서 기로에 서든, 갈림길에 맞닥뜨리든, 선택을 해야 할 때와 그냥 지날 때가 있다. 선택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 또한 선택이다. 그런데 그 선택과 결부시켜 사람을 분석하고 성향을 구체화하려는 과학적 작위행위가 과연 윤리적인가 하는 주제를 던지고자 한다.


선택은 보이는 것과 비밀스러운 것으로 나뉘어 있다. 대부분 보이는데 고민하는 자아가 또 다른 타인에게 자문도 해보고 도움도 구하는 과정에서 어떠한 상황인가 파악이 되니 보이는 선택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비밀스러운 선택 즉, 보이지 않는 선택이란 투표행위라든지 거의 사적인 생활 영역에 선택이다.


일단 두 가지 측면의 선택에서 범법적의 논거를 따지자면 비밀을 노출된 데에는 당연히 범죄적 행위에 단죄를 물을 수 있으니 당연한 것이고, 그리고 윤리적, 도덕적 행위에 종교적 신념 같은 정통적인 비윤리성을 고발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개인의 침해를 행한 데 대한 단죄일 것이다.


부정, 협상, 분노, 포기, 수용의 단계 중 포기만 남아있고 다 물 건너갔다. 부정한다고 해서 비윤리적 행위가 멈추지도 않고 양심에 호소하는 협상은 어불성설이고 수용 또한 포기와 같은 개념으로 치부되면 남아있는 것은 분노밖에 없다. 치밀하게 언급하면 포기에 가까운 분노랄까, 분노에 가까운 포기일 수도 있겠다.


어떤 것이든 이제야 당연한 윤리적 단죄를 논할 만큼 익숙해진 일상의 포기가 자유에 가깝다면 언제든지 그 자유를 찾아서 가야 된다. 그게 생(生)이든 사(死)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면 선택의 성향을 연구하는 지극히 비윤리적 과학적 작위는 누군가는 단죄를 해야 하는데 범죄자가 다수일 때는 무죄자가 범죄자 일뿐이다.


다수는 항상 진리였다. 주제를 바꿔 그럼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패턴을 분석해 본다면 이 분석 또한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면 주관적으로 그렇게 판단할 수는 있다. 노력하는데 시도조차 안 하는 심리는 무엇인지 말이다. 현실의 불만이 상황극이라면 그 상황극이라도 이해의 뒷받침은 논리이다.


앞뒤 말이 안 맞는 모순된 논리는 수용될 수 없다고 했다. 시나리오는 항상 극적인 스토리의 연결이다. 밑도 끝도 없는 메시지는 수준 높은 문학이나 영화 아니면 아예 수준 낮은 코미디의 양자 일뿐이데, 후자는 도무지 억지스러움이 모든 스토리가 맥을 끊어 놓는다.


직장생활에서 불만 많고 입버릇처럼 퇴사를 논하는 인간들은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도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 그런데 노력도 했고 착실히 캐리어도 쌓아놨는데 불만 또한 그 두배로 쌓아놓고 사는 행위의 인과관계는 모순이다. 떠나든지 불만을 없애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 이동의 힘을 아예 포기하고 있다.


불만은 없어지지 않고 이직이나 아님 다른 포지션으로 움직일 시도조차 안 하면서 불만만 말하는 것은 전체적인 스토리에 수준 낮은 코미디이다. 미련(未練)을 남기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하나를 선택하면 또 다른 하나는 획득하지 못한다.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하니 수용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움직일 힘, 즉 이동의 힘은 자신의 인생에 주관적인 힘인데 그걸 외부의 시선으로 비 윤리성을 감수하고 몰입하니 더더욱 힘을 못 받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선택 또한 각자가 선택하는 것이다. 남의 선택에 관심 가지지 말고 자아의 선택으로 돌아와 미련을 버리는 현명한 삶의 기조가 필요한 것 아닌가 싶다.


시절인연, 이동과 쉼의 힘, 그러한 글 자체가 협상과 수용의 단계는 이미 사라지고 포기와 버림의 장으로 옮겨온지 꽤 오래다. 당사자는 아는데 정작 남의 관심에 팔려 자신의 인생을 놓치고 있는 오류를 바로 잡으라고 하는 것이다. 범죄자의 처벌, 비윤리적 단죄 모두 다수가 기소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기에 포기한 지 오래다.


결국 선택의 폭은 좁다. 자유에 가까운 선택은 결국 자신이 알아서 선택하는 것이다. 주와 종이 이제 헷갈리기도 한다. 타인을 조정하는 자가 주(主) 같았는데 이런저런 상황 맞추고 타자의 상황을 파악하다 보면 어느덧 그 무리들이 종(從)이 되어있는 것은 아는 것인지? 하긴 결국 따지고 보면 모두 종(從)인 것을!


타인을 조정하는 자는 자신을 조정하지는 못한다. 자신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자신을 확신하지도 못한다. 항상 남의 테두리에서 그렇게 속이면서 기생한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된 자유를 착각하고 그렇게 주종이 뒤바뀌어 사는 것 아닌가 싶다. 반면 조정당하는 타인은 포기와 자유단계에서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두렵고 탄탄한 스토리로 창대하게 시작했지만 잦은 모순과 인과관계없는 가면 갈수록 허접한 논리로 미약하게 끝나는 수밖에 스토리는 외면받게 된다. 종영하던지 절판하던지 작가를 바꾸던지 삼류 코미디로 몰락하는 지경을 그토록 부르짖던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놔두는 것도 우습다.


어느 것이든 이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다. 비극은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그 비극이 그 어느 누구에게의 비극인지 아니면 그 모두의 비극인지 몰라도 해피엔드는 아니다. 그게 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 비극이 저질의 나락으로 떨어지며 비웃는 비극 또한 비극이다.


-2025년, 7월 폭우 내리는 날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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